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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눅18:31-34]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 |10-11-21 15:49 조회 |6,001회

본문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눅 18:31-34]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

1. 들어가는 말

부자 관원과의 대화를 통하여 영생,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에 관해서 말씀하신 주님이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그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단순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는 것은 바로 지금의‘나’와 연결된 것이어야 합니다. 이 사건은 지금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야만 비로소 예수 믿는 자가 됩니다. 그래야만 아무도 손도 못 대고 고칠 수 없는 나의 옛사람이 비로소 십자가에 못박히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부활하여 죄로부터, 귀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로버트 박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북한에 들어갔다가 잡혀서 카터 전미대통령이 가서 데려온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가 지금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서 말을 하는데, 자신이 북한에 잡혀갔을 때 심문하고 고문한 사람들을 보니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지 못하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악한 짓들을 하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귀신에 사로 잡혀 있어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생각할 기회도 능력도 없이 그저 그날 그 날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나 요즈음 주님께서 고침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들을 보면, 정말 정신 나간 채로 살고 있다는 표현이 그렇게 적확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이니 제대로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마귀에 잡힌 바 되고 악한 자에 처한 세상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런 삶에서 빠져 나와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곧 구원이고 영생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과정을 거쳐 죽고 부활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직 예수를 모를 때에 예수를 믿어주고, 교회에 나와주고, 목사님께 순종해 주고, 헌금해 주고, 새벽기도 나와주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면 그간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서 믿어주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해 왔다는 자체가 정신 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멋모르고 믿었던 자신을 주님께서 참아 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죄에 빠진 자신을 고치려고 할 것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시면서 인자가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을 받고 죽은 후 삼 일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니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도대체 지금의 ‘나’와 어떻게 실질적인 연관관계가 있으며,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함께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2. 본문 강해

2.1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연합의 표징(눅 18:31)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흔히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 한 분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같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입니다. 성경에서 예수와 연합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들이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하십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데 혼자 가시던지 하지 왜 12제자들을 데리고 가실까요? 그것은 말씀 드린 대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제자들과 연합되어서 진행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부자 관원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예루살렘으로 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혹 몸은 갈지라도 마음은 예수를 따라 연합할 사람들이 아니고, 오직 제자들만이 그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와 연합하여야 제자들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결국 그와 연합한 제자들의 옛사람의 죽음이고 그리고 그 후에 예수가 제자들 안에서 성령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을 산 자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실질적으로 십자가에 죽지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모든 육신적 소망과 꿈의 실체인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그들이 예수를 보는 모든 육신적인 시각도 절망 속에서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과하고 구원을 받아 새로운 세상에 부활하기 위해서는 예수와의 연합이 필수입니다. 우리 혼자 사망을 맞이하면 죽고 다시 오지 못하나, 생명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면, 그 예수로 인하여 우리는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이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명령에 따라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마음을 찢어서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을 내고 순종하려는 분도 있지만, 또 어떤 분들은 농담으로 여기거나,’나는 바쁜 사람인데 설마 나에게 하는 말씀은 아니겠지...’ 하면서 편한 대로 그냥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연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따로 자기 따로인 신앙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수와의 연합 없이 자기 스스로 주인 노릇하며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의 차를 가지고 운수회사에 들어가서 자신이 별개의 사장으로 일하는 지입차 제도와 같이 그들이 지입차 신앙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예수와 연합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부자 관원으로서 자기 옳다함으로 지입차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와의 연합이 없으면, 이 사망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여러분께 주님의 손길을 제시하고, 그것에 따라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주님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면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자신은 저쪽 거라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연합이 아니라 분리가 일어 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를 떠난 부자 관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그림은 제자들이 한 마리 어린 양의 상징인 예수그리스도 를 희생양으로 십자가의 제단에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의 상징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살아 계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고침을 받는 이 모습은 한 마리 어린양을 가지고 대속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로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온전히 순종하여 십자가를 거치게 될 때,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2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눅 18:32-33)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에게 넘겨집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한 로마군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능욕을 받고 채찍질 당하고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이것은 신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영적 의미가 지금 곧 예수 믿는 ‘나’에게 해당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가 이방인에게 넘겨 진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이방인이란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를 모르거나, 또는 믿지 않거나,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것은 예수께 순종하여 연합하는 과정, 즉, 예수에 의해서 지적 받고 고침을 받는 과정에서 고침의 아픔이 싫어서, 그것을 거부할 근거로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넘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편을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이방인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께서 헌금하라는 감동을 주셨을 때, 그 금액이 커서 순종하기 어려울 경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를 이방인에게 넘길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막고 물어 보라, 도대체 교회에 헌금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이 합당하냐? 없는 살림에 카드 융자 받아서 헌금한다는 것이 마땅하냐?”하며 생명의 주님과 그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끌고 가 그들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때 선한 마음으로 목사님께 양복 한 벌을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좋게 여겨 영적으로 고침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사님을 통하여 그의 숨겨진 생각을 드러내고 남에게 자랑하고 보이기 위해서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을 수시로 지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분이 참고 견디다가 어떤 계기가 되니까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목사님께 반기를 든 사람들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가난한 나로부터 양복을 받았다. 이것이 마땅하냐?”하고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도껏 해야지, 그 목사 너무하군.’ 하면서 정죄하고 침 뱉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이방인에게 넘겨지는 것은 지금 우리가 위의 예와 같이 예수를 이방인에게 넘겨 줄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든 일들, 주일 성수하는 것, 새벽기도 나오는 것, 금식하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로 비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고침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방인에게 교회 문제를 가지고 갑니다. 이 때 모든 것이 비방과 침 뱉음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방인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습니다. 또한 자기 생각과 달리 세상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이방인에게 넘겨 준 유대인들이 서기 70년에 로마 티토스 장군에 의해서 궤멸되었고, 예수를 팔았던 가룟유다의 비참한 말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채찍질 당하고 결국 죽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옛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지적하고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들처럼 좋은 말 해주고, 위로하고, 감싸주고, 심방해 주면, 분을 내거나 불평 불만하고 그 결과로 유대인이 했던 것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러남이 없고 고침이 없다면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는 귀신 들려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고 구제와 봉사로 교회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한 많은 인생, 허무와 공허한 마음으로 살다가 결국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한 것은 이와 같이 그 분이 우리를 고치려고 우리의 귀신들린 부분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귀신의 사주를 받은 우리는 예수가 해를 끼치는 줄 알고 예수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를 미워해서 십자가에 죽였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그렇게 자신을 고칠 때, 끝까지 잘 견디고 혹 불평하고 원망이 드러나면 회개하고 또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잘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 이것이 생명과 사망을 갈라 놓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권세를 부리는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망보다 큰 권세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는 그 사망을 통하여 부활함으로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죽음이 그의 부활에 굴복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의해서 육신은 죽었지만, 오히려 성령으로서 제자들의 마음 속에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을 때는 예수님 따로 제자들 따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몸 안에 성령으로 거할 수 있게 되고, 모든 거듭난 인생들의 몸 안에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지금 여기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3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눅 18:34)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듣기는 들어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은 그것을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 올 일에 대해서는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체험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 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부활이란 예수가 우리 마음 속에 성령으로 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자신은 믿음이 굳세고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세상 것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마음과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 동안 자신이 알고 본다고 했지만 잘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체험해 보고 막상 그런 삶을 살아 보아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주님과의 연합은 곧 순종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단계까지의 순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해 나가려 하고 주님과 연합하면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주님께서 이방인에 의해 고난 받으심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 안에 옳다고 하는 이방인이 있습니다. 그 이방인의 말을 들으면 예수를 정죄하고 채찍질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을 구원할 사람을 그렇게 대하니, 스스로 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인도되는 과정은 십자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부활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따라 온 만큼 알 수 있고 체험한 만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불순종하여 길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지금 바로 회개하고 주님과 연합하십시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제자중의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유교회
목 사
정 덕 영
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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