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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5-43]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 |10-12-01 18:24 조회 |7,290회

본문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5-43]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쫓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1.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문둥병 자, 귀신들린 자, 꼬부라진 자, 중풍병자, 여러 병든 자들,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못할 일이 없으신 큰 능력의 주님이시고, 그래서 그 앞에 가면 고침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시 유대지방에 오셔서 그곳에 있던 모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다 고치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유대에 있던 그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과 고침을 받은 자들을 비교하면 고침을 받은 자의 숫자가 훨씬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면 고통에 시달리는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다 찾아 나서서 고쳐 주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들에게 삶의 자유를 맛보게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왜 일부에게만 고침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고침은 고침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침을 받기 싫은데 억지로 큰 능력으로 고쳐 버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소경 중에 누가 눈 뜨기를 싫어하고, 병자 중에 누가 고침 받지 않기를 원하고, 귀신들린 자 중에 비참한 삶에서 벗어 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소경인 상태에서 그저 그날 그날 빌어 먹는 삶이 안이하고 편안하고 좋아서 그런 삶에서 종살이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늘 이 소경을 만난 후, 그가 당연히 눈을 뜨기를 원하겠지 해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자만이 고침을 받고 소망하는 자만이 소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 여리고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때 길가에 있던 소경 하나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합니다. 이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하니 갑자기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칩니다. 주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였지만 그는 더욱 더 크게 소리질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를 불러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니, 그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를 따랐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이 사건의 영적 의미, 즉 우리의 구원 그리고 거듭남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덜컹 구원하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고침 받기를 원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가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보시겠습니다.

2. 본문강해

2.1 여리고에 있는 소경의 구걸하는 인생 (눅 18:35-36)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여리고가 있습니다. 이 여리고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대비되어 세상의 상징입니다. 세상에 예수께서 오시는데 그곳에는 소경이 있습니다. 이 구도는 예수께서 이 세상의 재물과 육신적으로 먹고 사는 것, 일가친척, 그리고 육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눈이 멀어 버린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전부 이 세상에서 버려두고 갈 그림자인 세상 것에 가치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눔, 구제, 사랑, 자유, 평등, 박애, 서로 잘 사는 것, 등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삽니다. 몇 일 전 있었던 G20정상회의도 결국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생각으로 모인 것입니다. 물론 각 나라가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 공멸합니다. 그러나, 각 나라가 서로 도와주면서 오손도손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아니며, 그렇게 산다 한들 각자가 진리의 길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그 신기루 같은 사랑과 세계평화를 기대하기도 하고 자신의 재산 그리고 명예와 목숨을 유지하고 보호하려고 이 세상의 삶을 전부 투자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수고와 슬픔뿐이고, 허전함과 회한이 가득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예수를 통하여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믿게 되면, 진리를 믿는다고 하지만 비진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선행을 하고 교회도 크게 짓고 헌금도 많이 하고 할 것입니다만, 그 모든 것이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삶이요 믿음입니다. 소경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경이란 시력이 없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에 모든 가치기준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소경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소경이라고 하자 그들은 우리가 왜 소경인가? 하며 의아해 했던 기록을(요9:40)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육신이 썩을 때 다 놓고 갈 것에 인생을 투자하고, 그 썩어질 것에 종노릇하게 만드는 시각이니,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소경은 구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구걸이라는 삶의 방식은 죄인들인, 영적 소경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방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상대방에게 구걸하는 것입니다. 직장과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상대로부터 무엇을 얻어 내려는 (구걸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구걸의 관계는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와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생명의 관계에서 오가는 것은 구걸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서 참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는 사랑과 생명의 관계이지, 법에 의해서 의무적으로 주고 받는 구걸의 관계가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세상이 타락하여 생명의 관계의 그림자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구걸의 행위를 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부모는 자식들에게 유산을 일찍 물려주고 나면 부모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유산을 나누어 줄 때도 죽기 바로 전에 주어야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지혜로운 부모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식의 사랑을 사랑의 행함으로 자연스럽게 받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그 사랑의 행위를 구걸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부부 사이의 관계도 사랑의 관계이어야 하지만, 피차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구걸하는 관계인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이 세상 것에만 시각이 고정되어 있는 영적 소경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들은 그렇게 구걸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걸을 성경에서의 다른 표현으로는 장사치의 거래라고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꼭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받아야 내어주는 거래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이 여리고에 있는 소경은, 이 세상에서 눈 먼 채로 땅의 것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며,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2.2 예수의 지나감 (눅 18:36-38)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런 소경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예수가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외쳐서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이 소경은 자신이 소경으로 구걸해 가며 사는 인생에 한계를 느꼈고 올바른 삶, 눈 뜬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할 능력을 가진 예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는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자신이 눈을 뜨기를 원하는 소경이었습니다. 이 소경은 지금 이 기회, 예수가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영원히 예수를 다시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간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경의 종국을 보면 과연 예수를 붙잡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 세상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이 세상에서 구원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생각 없이 인생을 살고 신앙 생활하는 자들은 그저 예수를 통해서 옷이나 한 벌 얻어 입거나, 물질을 얻거나 육신의 병을 고치고 세상 권세를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들은 예수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예수가 아무리 자신 앞을 지나친다 해도 붙잡지를 못합니다. 새 생명을 구해야 예수를 잡을 것인데, 새 생명이 귀찮은 것인데 무얼 그리 찾아 헤매느냐는 생각이니 예수를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소경 앞을 지나갑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소경은 다시 눈을 뜰 기회가 없습니다. 다행히 이 소경은 이 기회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교회의 말씀이 우리 앞에 그리고 이 글을 읽고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듣는 말씀이나 읽는 말씀이나 공히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내용입니다. 말씀의 깊이나, 말씀의 이치나, 말씀의 정확성과 옳음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이곳에 참 진리의 말씀이신 나사렛 예수가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리고 홈피의 글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이치적으로 옳다고 동의하고 무릎을 친다한들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 말씀에 감탄하고 감명받고 끝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주체이신 그 사람인 예수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우리를 눈뜨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홈피의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인 교회에 나와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들어도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내가 교회에 나오고 싶으면 나올 수 있으니까, 나는 항상 말씀이신 예수를 만날 수 있으니,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모래 언제든지 와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오늘 살았으니 내일도 살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소경인 우리 곁에 영원토록 있지 않습니다. 지나갑니다. 예수가 우리 곁에 있을 때, 지금 잡을 수 있을 때 잡지 않으면, 소리쳐서 그의 관심을 끌지 않으면, 예수는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지금 나사렛 예수가 여러분 곁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가 지나간다는 그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때 자신이 이 소경과 같이 자신의 인생이 구걸하는 자이고, 그곳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예수를 그냥 그렇게 지나치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소리쳐 그 예수를 붙잡고 따라 나서야 할 것입니다.

[고후 6:]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정말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고, 자신의 귀신 들린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말씀 좋고 깊구나” 하는 품평회만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 이런 구걸하는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외침을 가지고 지금 말씀이신 예수 앞에 올 것입니다.

2.3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눅 18: 39-40)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소경이 예수를 부르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니까, 이 소경은 더욱 심히 소리를 질러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소경이 주변 사람의 제지를 무릅쓰고 다시 큰 소리로 지나가는 예수를 불러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소경은 자신의 기존 생활에 정말로 절망하여 그곳에서 나오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정 소경의 삶을 청산하기를 원했습니다. 고침을 받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 사람은 주변의 환경에 주눅이 들지 않고, 그 환경에 굴하지 않고 예수 앞으로 나와서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어떤가요? 지금 예수가 지나가고 있는 이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요란스럽게 예수를 믿는가?”
“이 교회만 하나님이 있느냐? 다른 교회 나가면 내가 차 사주겠다.”
“철야예배에 새벽기도까지 나가고 아주 미쳤구나.”
이것은 예수가 지나가는 동안에 소리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잠잠히 하라”는 주변 사람의 회유와 위협과 핍박입니다. 모르는 자들이야 그런 핍박에 조용하겠지만, 그러나 자신이 점차 눈을 떠 가고 있는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말에 잠잠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잠잠하면 그들이 나를 대신해서 소경으로 살아 줄 것입니까? 내가 소경으로 살아야 할 내 인생을 저들이 뭐라 한다고 해서 눈 뜨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지, 자신은 더욱 더 큰 소리로 예수를 불러 세워서 고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소경이 이렇게 열심을 보이니까 비로소 예수가 그를 불러서 만나게 되고 결국 이 소경은 예수에 의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눈을 뜨게 되는 소경이나 병고침을 받은 자, 귀신들림에서 해방된 자들은 공히 이 소경과 같이 고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가 예수를 만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제목만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세상 삶에 만족하면 입으로 아무리 그렇게 기도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냥 이 세상이 좋으면 그대로 소경으로 사십시오. 눈뜨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예수도 어쩔 수 없습니다.

3. 맺음말

말씀은 다음 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종합해서 말씀 드리자면, 이 구걸하는 소경은 바로 이 세상에서 살면서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 구걸하고 사는 죄인된 우리 자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를 그냥 지나치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말씀을 화면으로 받는다거나, 또는 말씀의 현장에 와서도 자기 말씀으로 받지 않고 고침을 거부하는 모든 행동들이 예수를 자신으로부터 지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 갈급한 사람은 모든 장벽을 넘어서 예수를 따릅니다. 그래야 예수를 만나게 되고 고침을 받아서 남은 인생 거지로 구걸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똑바로 보고 제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육에 속한 자로 사는 것과 거듭난 자의 삶을 비교하면, 소경으로 구걸하며 사는 삶과 정상인으로 눈 뜨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의 차이입니다.
예수를 지나쳐 보냄으로 소경으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께 불쌍히 여겨 달라며 따라 나서서 눈을 뜬 자로서의 삶을 살겠습니까?
여러분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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