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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인 같이 하지 말라 (19-요일 3:11-1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7-01 20:59 조회 |4,195회

본문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요일 3:11-12]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가시나무는 포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를 맺으려고 한다면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시나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면 그런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산물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받으소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이렇게 피나는 노력과 열심과 정성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가시나무인데 거기서 무슨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 열매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때 하나님이 자신의 열심과 진심을 몰라 준다고 성질을 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 어떻게 가시나무에 달린 포도열매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생명과 진리의 흐름에서 이탈한 사망과 거짓의 산물일 뿐입니다. 자신이 보지 못해서 그것을 받으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이지, 깨닫고 나면 그런 자신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때가 우리에게 빨리 와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고 이어서 가인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과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가인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가인과 같이 살인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살인하지 않고 있으니 이대로 충분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사랑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인과 같이 하지 않는 것인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할지니... 
 
[요일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자는 이 말씀에 언제나 마음이 움직입니다. 사랑하자는 말에 누구 하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또는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 누가 사랑하자는 말에 반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비판과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이란 지금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사랑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친이 죽을 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긴 날 동안 자식들이 교대로 간호를 했고, 이 분도 그렇게 했습니다. 완치되어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간호를 하는 기간 중에 개인적인 볼 일 때문에 몇 일 동안 자기 간호 몫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간병인을 잠시 쓰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은 심히 분개해 했습니다. 
 
  "아버지가 입원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서로 논쟁하는 과정에서 이 분은 형제들에게 살해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잘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살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나, 집안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나 다 같은 비중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몇 일 간병인을 쓰자는 형제에게 살기를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부모를 사랑하자"라는 말을 기화로 자기 욕심을 집행하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는 것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고 살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도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사랑일까요? 정말 끔찍한 일을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저지르고 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흉악한 자들입니다.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사랑이란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후천적으로 취득해야 할 무엇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얻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한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먼저 사랑을 얻어야 합니다. 
 
  요한이 여기서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하는 것은 지금 이대로 우리가 힘든 노력을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노력하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미련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을 얻어서 그 사랑으로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먼저 사랑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얻는 길은 예수를 만나서 그 분에 이끌린 삶을 3년 반 동안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사랑할지니" 라는 말씀이 이런 사람들에게 비로소 통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고, 예수의 사랑의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한시 바삐 거짓의 세상,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살인을 일삼는 그 비 진리의 세상에서 나와, 참다운 예수의 사랑을 나타내는 세상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의 소속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에 속하느냐 아니면 예수에 속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이것은 가시나무가 포도나무로 변해서 포도열매를 맺은 모습입니다.
 
+ 처음부터 들은 소식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처음 믿게 될 때부터 들은 말씀이라거나 혹은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을 때부터 들은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이란 단어는 "아르케"라는 헬라어로서 근원, 근본, 머리라는 의미로 볼 때,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곧 예수의 말씀입니다. 
 
가인의 제물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은 형제이고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이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아벨을 양의 첫새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은 심히 분을 내었고, 들에 있을 때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인이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악한 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가인의 행위가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가인이 무슨 행위를 했습니까? 그것은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제물이 악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아벨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아니 제물을 안 드려서 문제이지 제물을 드렸는데 그것이 악하다는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자, 우선 가인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가인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인을 일삼는 망나니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땅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의 소산이란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열심과 선과 사랑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나는 선과 열심과 사랑이 무엇이 나쁘기 때문에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죄인에게서 나오는 죄의 산물이고, 비진리의 인간에게서 산출되는 거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인의 제물은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었다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 거짓과 비진리의 산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가인은 지금 예수 믿고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런 거짓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를 들자면, 부모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병간호를 몇 일 쉰다고 형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그것이 온당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사랑한 결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인의 제물입니다. 
 
[창 4:5-7]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열심과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을 알고 심히 분을 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얼마나 열심히 자기식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으니까 성질이 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살인도 하게 됩니다. 과연 요한의 말대로 그이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시나무의 포도열매를 받을 수 없고, 그러면 또한 그 가시나문은 분을 내고, 그래서 옆에 있는 형제를 죽이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자신이 포도나무로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인처럼 생각하고 가인처럼 행동합니다. 자신은 이미 예수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했을 때 구원 받고 포도나무로 변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죄사함 받았는데 계속 죄를 짓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명백하게 자신이 가시나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안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자신이 포도나무라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 구원은 시작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이 말은 결국 무엇입니까? 가시나무인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를 따라 나서 먼저 포도나무로 거듭나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는 사랑의 형상으로 거듭나고 아벨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포장하여 상대방을 죽이거나 압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려는 노력으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인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초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먼저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아 사랑의 형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인같이 하지 맙시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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