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PW AUTO 
 

  새소식 칼럼 말씀 기획연재 대화실 자료실 교회안내 기독서원학개 전도자들
영어사이트
교회학교
 
 
[관리자] 2024. 1117 주일…
[관리자] 2024. 1110 주일…
[관리자] 2024. 1103 주일…
[관리자] 2024. 1027 주일…
[관리자] 2024. 1020 주일…
[관리자] 2024. 1013 주일…
[관리자] 2024. 1006 주일…
[관리자] 2024. 0929 주일…
[관리자] 2024. 0922 주일…
   
 
 
 
 
하나님께서 주신 꿈 (1)
폭포의 꿈 (2)
1월 18일"선한사마리… (1)
방언에 관하여..... (1)
몰렉신 상징성
답변글 몰렉은 내가 만든 예수 (3)
 
        

제목 |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20-요일 3:14-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7-04 10:48 조회 |3,638회

본문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요일 3:14-16]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흑백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흑이 아니면 백,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방식의 두 가지로만 구분하려는 논리입니다. 두 가지 극단 이외의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편협한 사고 논리라고 해서 우리들은 이런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색깔을 생각해 보면 흑 아니면 백인 것이 아니라, 푸를 청(靑)도 있고, 붉을 홍(紅)도 있고, 누루 황(黃)도 있고, 적(赤)색, 회(灰)색, 초록(綠) 등 다양한 색들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의견만이 옳고 다른 상대방의 의견은 다 틀렸다고 무시하는 흑백논리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색(色)이라는 정의 안에서만 해당되는 가능한 논리입니다. 색 안에서는 여러 가지 색들이 있고 따라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틀렸다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색이라는 정의를 넘어서면 색 아닌 것은 전부 색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색을 말하는데 '컴퓨터'나 또는 '책'은 전부 틀린 것이고, 그릇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흑백논리는 배척해야 한다"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때는 흑백논리가 백 번 타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언어로 정의하게 되면 본질상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의 구분만이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마이크' 하면 이 세상은 '마이크'인 것과 '마이크 아닌 것'으로만 구분이 됩니다. '마이크' 말고, '책상'도 있고, '사람'도 있지 않느냐는 말은 '마이크'의 정의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마이크만 마이크입니다. 책상이 마이크일 수 없고, 사람이 마이크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정의되면, 이 세상에는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무엇인지 세상의 다른 것과 구분이 되고, 그것이 그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진리를 말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진리' 하면 이 세상에는 진리와 진리 아닌 것 ,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모든 것은 비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세상, 사랑 아니면 미움, 생명 아니면 사망, 빛 아니면 어둠입니다. 이것을 흑백논리와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할 때 제가 전하는 이 복음이 진리이고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복음을 전하면 제대로 된 진리를 전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제가 전하는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비진리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도 맞고 상대방도 맞고 한다는 식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전하는 복음이 제대로 된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일견 포용력이 있고 달콤해 보이지만 가짜 진리요 비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고 다른 것은 비진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자기가 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갈1:8). 참 진리를 가진 사람들의 말이 이렇습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온 것이고, 사랑치 않는 자는 아직 사망 중에 거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고 그에게 영생이 없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요한은 여기서 사망에 속한 자가 생명에 속한 자로 옮기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 말씀 드린 대로 진리 아니면 비진리, 생명 아니면 사망, 사랑 아니면 미움이라는 기본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형제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죄인이 참다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만나 3년 반 동안 고침을 받으면 이제 그 안에 성령이 임합니다. 이 성령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게 된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자는 그 사랑을 가짐과 동시에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의 세상으로 소속을 옮기게 됩니다. 요한은 이런 진리를 바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생명,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간이나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형제를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해석할 말씀이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사망에 속해 있다가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그가 예수를 만나서 고침을 받고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 즉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영혼이 죽은 상태였던 그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세상에 들어 간 것입니다. 

  역으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이고, 그는 아직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지 못했고 또한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망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거하지 못하면 사망에 거하는 것이고, 생명에 거하면 사망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이 아니면 오직 사망일 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시기한다, 질투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을 떠나왔기 때문에 이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자입니다. 물론 이런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고침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형제를 미워하는 자, 아니면 형제를 사랑하는 자, 이 두 부류의 사람 밖에 없습니다. 

+ 살인하는 자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살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이고, 그는 곧 살인자입니다. 이렇게 보면 살인이라는 의미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살인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인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는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자기 원하는 바대로 드렸다는 것이고, 이때 이미 가인은 죄인으로서 영적으로 살인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을 실제로 죽이기 이전에 가인은 이미 살인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살인이라는 의미도 같습니다. 

[마 5:21-22]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지 않은 자는 형제의 눈에 티끌을 찾아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이 삶 자체가 형제에게 노하고, '라가'라고 하며 미련한 놈이라고 하게 됩니다. 다. 이렇게 형제를 판단하게 되는 근거는 사실 자신 안에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들보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형제 눈의 티끌을 발견해 냅니다. 이런 들보를 가진 자가 살인하는 자입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말씀도 예수님과 요한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육신의 살인으로만 생각하고, 자신은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고, 당연히 영생인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영생'은 다같이 예수에 의해서 구원 받은 사람에게 임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는 날 때부터 살인하는 자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이고, 사망에 거하는 자이고, 영생이 없는 자입니다. 죄인으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엡 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자, 이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살인하지 않고, 사랑하고, 생명에 거하고, 영생을 얻은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서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이것은 "이천 년에 예수님께서 그 일을 이루셨고, 나는 그 예수 믿었고 교회 나왔고 예수를 주로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했기 때문에 나도 구원 받게 되었다"는 방식으로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 일이 지금 우리에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를 만나야 하고 그 예수가 우리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 받아 살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예수가 그를 위하여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려고 해도 되지 않던 사랑이 임하게 됨으로써 우리도 사랑을 가지고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이제 남은 인생 기간 동안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삶입니다. 사도들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지하철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끌어내고 자신은 죽는다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되고 한정되어 있는데,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거듭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만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무가 아니라 그들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 갑니다. 사도 요한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맺는 말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의 세상으로 옮겼습니다.  반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사망의 세상에 거합니다. 백 아니면 흑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입니다. 살인하는 자는 또한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의 생명인 영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체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삶을 소망하십시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문서 목록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