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을 사랑함 (29-요일 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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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8-11 15:11 조회 |5,702회본문
하나님을 사랑함 [요일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열 길 물속을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고, 이런 시조도 있습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건 너 뿐 인가 하노라" 이것은 우리 인생의 문제가 안과 밖이 같지 못한 것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한다 하지만 속에는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렇게 안과 겉이 서로 다른 자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 또는 위선자(僞善者)라고 합니다. 위선자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비 진리가 자리잡고 있어 그로 인한 행동이 그냥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 진리의 행동을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고 도태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속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 욕심만을 챙기려고 하고, 상대를 미워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하면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진리와 선의 삶과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이미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고, 양식 있는 사람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런 인생을 겉과 속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겉과 속이 하나가 되려면 먼저 속에 진리가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겉은 그 진리에 입각한 행동이 흘러 나오게 되어서 겉과 속이 하나가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되면 자유자가 되고 사망의 세상에서 나와 생명의 세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만큼 우리를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하는 요인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도 나도 사랑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정작 겉과 속이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눈을 씻고 보아도 없습니다. 전부 자신의 안에게는 악독과 탐욕이 가득한 상태에서 겉으로만 사랑을 외치고 거짓 사랑을 행위를 합니다.
요한은 본문 말씀으로 참다운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사랑이란 겉과 속이 같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이 겉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은 바로 이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선 이 말씀을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꼴 보기 싫은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식으로 읽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려고 해왔지만 잘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열심을 내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금하고, 주일 성수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이 이삭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두 말없이 그를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를 막 칼로 찌르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의 행동을 막습니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창21:5) 바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마저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드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의 모형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따라 나서는 것이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키운 사람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자라나고 그 자라난 결과로서의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의 행동이 단순히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어떤 사람도 독한 마음을 먹고 하나님의 유사한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행위이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자라나게 하신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자라남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 불순종하여 하란에서 머물렀고, 가나안에 가서도 가지 말라는 애굽에 내려가 아내 사라까지 빼앗길 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구해주었던 것 등, 많은 경우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 아브라함을 자라나게 하셨고 또한 이삭을 바치라고 해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순간적으로 독한 마음을 먹고 그런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라게 하신 것의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운 사람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키우심은 현 시대의 우리에게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어느 분이 이사 문제로 저와 상담을 했습니다. 어떤 집을 택하여야 할지 저에게 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집을 구해야 투자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여름에 시원하게 겨울에 따뜻하게 냉난방이 잘될 것인지를 묻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확인하고자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에게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 일은 당사자가 주님께 기도하고 갈등하며 답을 얻을 문제이지 제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문제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종국적으로 스스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결정할 수 있어야 이삭을 바치라는 말에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분은 이전에는 목사님이나 주변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확인해서 순종하고 따라 나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마음 속에 주는 아주 세미한 느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조차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그런 음성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 몹시 걱정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주님께 순종하는 문제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속에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매번 정답을 알려 주면 답답한 마음에 당시에는 좋겠지만 그러면 그는 스스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 경우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항상 선지자를 찾아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는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지 자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키우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도 이삭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변화 받은 자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설 수 있게 된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입니다.
+ 거짓말 하는 자
본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분의 사랑을 자신 안에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안에 임하게 되고, 그 사랑이 그에게서 넘쳐 흐르게 됩니다. 명실공히 안과 밖에 같이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형제를 미워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수록 더욱 더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그것도 또한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속에 사랑이 없는데 겉만 사랑하려고 해 보았자 무의미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신 안에 사랑이 없고 그 사랑 없음이 형제를 미워하는 행함으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비밀을 다음 말씀으로 계시해 줍니다.
"(왜냐하면)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우선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는 이 사랑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은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우리 안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 후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전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는 않는다는 당연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23:25-26]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보이지 않는 안을 먼저 깨끗이 해야 보이는 겉이 깨끗해 지는 것입니다. 겉이 더러운데 안을 깨끗이 했다고 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주께 받은 계명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이전에 계명은 "예수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요일 3:23) 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뒤 부분의 각 말씀의 후반부인 '서로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전반부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아니면 같은 말씀일까요? 둘 다 같이 계명이라고 하니까 같은 내용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침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를 따라 나서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면 그것이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형제에게 사랑이 그냥 흘러 넘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형제 사랑하는 것이 일이 아닙니다. 그냥 삶 전체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 지금 여기서 보는 사도 요한의 모습에서 참다운 형제 사랑을 보게 됩니다. 맺는 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통하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성장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형제를 사랑합니다. 보이지 않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했고 이제 그 사랑이 보이는 세상 형제에게 표출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신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우리가 받고, 그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온전히 겪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모든 인생이 갈망하는 사랑의 삶, 그렇게 긴 세월 노력해도, 예수 믿어도 되지 않던 그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비밀이 이 말씀에 의해서 계시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빕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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