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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눅14:25-3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08-04 09:34 조회 |6,033회

본문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눅14:25-33]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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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나는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우리가 제대로 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를 따르는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예수를 따르는 삶이 없이는 예수에 의해서 내가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 사용되는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제자들이 예수를 만나고 그를 따랐던 십자가 사건 전까지 3년 반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그 기간 동안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제자들'로 자리매김을 했고, 그 후에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따르는 기간은 예수가 제자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고치는 기간이고, 우리에게도 역시 이 기간이 삶 속에 있어야 예수로 인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예수의 온당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나선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수를 따르는 삶이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이 말씀으로 예수를 따른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같이 이 내용을 살펴 볼 텐데 만일 자신에게서 이런 삶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개요]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를 때 뒤를 돌아 보시면서 자기 부모,처자,형제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아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화를 들어 말씀하시길 '망대를 지을 때 준공까지 계산하지 않고 지으면 기초만 짓게 되고 그러면 남들이 비웃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자신에게 군사 일만이 있는데 이만 군사로 쳐들어 오는 저쪽 나라와 싸워 이길 승산이 없으면 그들과 전쟁이 있기 전에 얼른 화친을 요청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너희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소금은 좋은 것이나 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데없어 내버림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시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방향]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말씀 함께 살펴 봅니다.
먼저 예수를 따르는데 나타나는 삶의 모습과, 망대와 두 임금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는 삶'이 없으면 예수 믿는 것은 헛것이라는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또한 본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2. 본문 설명

2.1 제자의 길 (눅14:25-27)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허다한 무리]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물 위를 걸으시니 당시 유대인들은 '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다'라고 하면서 따라 나섰습니다. 허다한 무리라고 한 것을 보니 구름같이 많이 모여들어 예수를 뒤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외형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예수 편이고 예수를 위해서 무슨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추종자들을 뒤돌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를 따르려면 부모,처자,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렇게 따르는 사람들이 없어서 걱정이지,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왜 언뜻 받아 들이기 힘들고 예사롭지 않은(?) 조건을 말했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그렇게 모아 가지고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아무나 예수의 제자로 따라 나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사람만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허다한 무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따라 나선 것을 익히 아십니다. 그래서 뒤돌아 보면서 하신 말씀은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육신적 세상의 구원자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연단하여 세상적인 인정을 미워하게 하고, 너희 목숨마저 미워하게 하여 너희를 고치기 위해서 왔다. 너희는 너희의 옛사람으로 인해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에게 물질축복을 주려 온 것이 아니라, 너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왔다는 뜻입니다.

[허다한 무리의 실상]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했지만 여전히 이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디오빌라도에게 잡혀갔을 때,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주고 싶은 마음에 유대인들에게 바라바를 내 줄까? 아니면 예수를 내 줄까? 했습니다. 이때 허다한 무리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자들입니다. 허다한 무리는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예수가 이루어 주지 않는 것을 알고는 등을 돌렸던 것입니다.

[현재의 허다한 무리]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1200만 명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예수상이 성경의 허다한 무리와 다릅니까? 아니면 같습니까? 그들과 같이 자신의 어떤 육신적인 축복을 원하고 있다면 허다한 무리처럼 예수를 잘못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부모자식,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자기 목숨도 미워해야 한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차 제대로 모릅니까? 그렇게 한 적이 없고 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오래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자신은 이미 허다한 무리로서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예수를 믿었다가는 종국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허다한 무리가 냈던 소리를 자신도 내게 될 것입니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를 미워한다는 의미]
허다한 무리에서 빠져 나와 제자의 길을 가려면 부모자식, 형제자매 및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친인척을 미워하고,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면 예수가 '너 참 잘했으니 나의 제자 해라!'고 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미워해야 하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있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결정을 하게 될 때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육신적인 감정으로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족의 정이 예수를 따르려고 할 때 한없이 잡고 늘어지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미워해야 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주님을 따르는데 그것이 장애물이 되면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단호히 끊게 된 관계는 주님이 다시 더 좋은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설명은 하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를 만나는 체험이 없으시고 그래서 예수를 따라나선 적이 없으신 분들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며 이해가 쉽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예수의 인도하심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지하지 못하니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예수님이 이끄시는 것인지 그냥 일어나는 일인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부모자식을 미워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근본적으로 이들에게는 예수의 이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자기 목숨이란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하는 우리의 태생적 목숨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이며, 제자가 되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곧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일터로 나가야 하는 상황과 말씀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겹칠 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목숨'이 미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말씀을 택하기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어떤 지침을 주고 계십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아무튼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서 우리는 치열한 영적 싸움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를 따르게 될 때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포기한 목숨은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6:32). 이와 같이 예수 믿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 전체, 즉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니 제대로 예수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
일가친척 및 목숨은 자신의 외적인 요인에 관계된 문제라고 말한다면, 자기 십자가는 자기의 내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자신의 혈기나, 옛사람의 욕망, 그릇된 시각 등을 고침 받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증거]
우리 모두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자들은 위에서 살펴 본 갈등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자기 목숨이나, 옛사람의 소욕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삶이 자신에게 보일 때, 그것은 자신이 올바른 제자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갈등의 체험이 없으신 분들은 자신의 생각이 어떠하던 간에 아직 허다한 무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2.2 망대의 비유 (눅14:28-30)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 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망대의 비유를 주신 배경]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서 가족부인, 자신의 생명부인, 자기 십자가를 짐, 등의 체험이 없으면 예수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체험 없이 믿음의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다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체험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믿음이 완성되었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큰 착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님은 망대 준공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망대를 건축할 때 준공까지의 비용을 계산합니다. 어느 멍청한 사람이 망대를 세울 때 준공까지의 비용을 계산하지 않을까요?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은 단연코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 비유는 무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믿음의 망대를 건축하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준공까지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초만 쌓고 있기에 그것을 깨우치시기 위함입니다.

[왜 기초만 쌓게 될까요?]
그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기초만 쌓게 되는 것일까요? 이들은 물론 준공까지 예산이 얼마나 들지 계산하고 또 계산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실상 그 준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모르는 준공을 놓고 아무리 계산을 해도 그것은 준공까지 계산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기초만 쌓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준공까지 계산하려면 우선 준공까지의 과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과정을 아는 자들은 준공에 필요한 예산을 세울 것이고 그렇게 망대가 건축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준공까지의 비용을 계산하느냐? 또는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다 계산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준공까지의 과정을 아느냐? 또는 모르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기초만 쌓는 자들은 준공까지의 과정과 준공을 모르는 자들이고, 망대를 준공하는 자들은 그 모든 준공과정을 아는 자들입니다.

[망대의 준공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믿음 망대의 준공과정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 부모자식, 형제자매, 자기 목숨을 미워함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를 따라서 믿음의 망대를 완성할 수 있으려면 이런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을 알고 계산에 넣은 사람은 당연히 망대를 완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워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계산에 넣을 수 조차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기초만 쌓고 망대를 완공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쌍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제대로 믿으려면 우선 이러한 과정을 알아야 하고, 이런 과정은 삶 속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에게만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서 그 과정에 관해서 아십시오. 그래야 자신의 믿음의 망대를 완공할 수 있습니다.

2.3 어느 임금과 다른 임금의 싸움 (눅14:31-32)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세상과의 화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입니다. 가족과의 인정을 끊는 전쟁, 먹을 것과 마실 것의 실존에 상관된 문제를 포기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비유에서 일만을 가진 임금은 예수를 믿고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를 말하고 이만을 가진 다른 임금은 예수를 따라 나섰을 때 저항하는 요소들, 즉 가족과의 인정을 끊는 문제,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하는 문제, 자기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말합니다.
군사의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편이 상당히 불리한 입장입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가족의 정을 끊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을 미리 계산하고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화친의 사신을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화친이 좋은 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의 인정과 화친하고 자신의 목숨과 화친하는 것은 인정에 이끌리고 먹을 것 마실 것을 찾아 다니며 예수 따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의 화친은 세상과의 화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화친한 자]
실상 알고 보면 예수를 삶 속에서 만난 자들은 이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만 임금과 화친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싸워 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만 임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와의 싸움이 없었다는 증거고 그것은 곧 이미 예수를 버리고 그와 화친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싸움의 체험이 있는 사람만이 제자인데 이것이 없다면 자신이 예수의 제자일 이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만 임금으로 비유된 세상 것, 즉 가족에 대한 인정과 자기 목숨 등과 화친한 채로 예수 믿는 자들은 외형상으로는 예수 믿는 자이지만, 실제는 예수와는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고, 망대의 비유에서 기초만 파고 준공을 하지 못하여 비웃음을 사는 자들입니다.

2.4 자기의 모든 소유 버리라 (눅14:33)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모든 소유]
예수를 따르려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란 물질적 소유를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부모 자식, 형제 자매, 물질, 건강, 인간적인 정,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살아 온 삶의 가치 전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추구하며 살아 보았자 그냥 70-80년 고생하다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 고작이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너희 모든 소유를 저쪽 변소 뒤에 버리고 난 후에 나를 좆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소유는 우리 존재 자체, 즉 옛사람의 산물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는가?]
그럼 어떻게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33절의 말씀과 같이 "이와 같이" 해서 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란 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를 따르며 부모자녀 형제자매를 미워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말합니다. 즉 그런 삶을 살게 되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렇게 하면 자신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어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자신의 소유를 버린 사람은 곧 예수의 제자입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면 제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2.5 맛을 잃은 소금 (눅14:34-35)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맛을 잃은 소금]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세상의 빛이라(마13:14-15)"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거의 포기상태로 있다가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의지를 불태워 보지만 그것도 잠깐 다시 시들해 지고 맙니다. 소위 이것이 세상에서 소금 역할을 하기 위해서, 소금의 짠 맛을 보여 주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은 짭니다. 짜지 않은 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금과 짠 맛은 하나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애초에 소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은 소금의 맛을 내려고 노력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금이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면 짠 맛을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있는 자체로 짠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짠 맛을 내려고 노력한다는 자체가 자신이 소금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소금이 아닌 자는 소금으로 변하는 것이 우선이지 짠 맛을 내기 위해서 땀을 흘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렇게 '짠 맛을 내려고 노력하는 소금'을 '맛을 잃은 소금'이라고 비유를 하십니다. 실상 이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가짜 소금'입니다.

[짜게 할 방법이 없다!]
'맛을 잃은 소금'은 그것을 짜게 할 방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소금이 아니면서 소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을 지속하는 동안 소금으로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막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소금인데 뭐 또 소금으로 변하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확고부동하게 소금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그 사람을 소금으로 바꾸어 짠 맛을 내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도 저기도 못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행세를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자이고,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이것에도 저것에도 쓸모가 없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입니다. 자연적으로 내어 버려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 예수 믿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맛을 잃은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맛을 잃은 소금' 에서 '소금'으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3. 맺는 말

지금 이 순간에도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제자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따라 나서게 되면 '부모자식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것을 치룬 자만이 예수의 제자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없으면 망대를 짓다가 기초만 마쳐서 비웃음을 사는 자이며, 이만 임금과 화친한 자이며,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의 제자입니까?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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