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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히4:8-1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08-22 01:02 조회 |8,304회

본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히4:8-12]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1. 들어가는 말
 
  [연단의 과정]
  죄인이 의인으로 거듭나려면 그 이전에 꼭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에 의한 연단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나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 또한 없습니다. 거의 모든 신앙인들이 바로 이 연단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새로운 생명 즉 의인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육으로 난 생명을 가지고 육신에 속해서 살다가 그냥 그렇게 죽게 됩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연단을 잘 견디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을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던 이유도 이들이 이런 연단의 아픔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의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 가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응당 연단의 아픔이 있을 것이나 포기하지 말고 견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라는 말은 바로 그 뜻입니다.
 
  [개요]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하며, 그 안식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들과 같이 불순종하는 본을 따르지 말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만물을 그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방향]
  언뜻 안식에 들어 가기를 힘쓰라는 말씀과 뒤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 제대로 연결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안식에 들어 가려고 힘을 쓰라고 하다가 왜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성을 말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일하는지에 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2. 본문 설명
 
  2.1 하나님의 안식 (히4:8-11)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배경 설명]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와서 광야생활을 하다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각 지파가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모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다가 참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교사면 교사로, 은사를 행하는 자는 행하는 자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자로 물질 사명자는 물질로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준 안식]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의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그 이후로 우리 모두에게 안식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들어 간 안식은 모형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런 과정을 밟아서 각자의 안식에 들어가야, 그 안식이 내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 앞에 안식이 소망으로 있는 것입니다.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 안식에 들어가려면 힘을 써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불순종하여 광야에서 시체가 널 부러진 사람들과 같이 되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히3:15-18]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결국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데, 힘쓴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불순종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순종하면 들어갈 수 있으니 힘써서 순종하라는 권면입니다.
 
  [불순종하는 우리]
  아니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어느 미련하게 믿는 자가 불순종하겠는가? 생각할 지 모릅니다. 순종하고자 해서 교회에 나온 것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그렇다면 행동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행함으로 연결되지 않는 생각은 오직 귀신적 생각일 뿐입니다.
 
  왜 행함으로 나오지 않는지, 왜 불순종하게 되는지에 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 우리의 옛사람을 수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피해서 순종치 못하고 멀찌감치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순종이고 그런 사람들의 시체가 광야에 널부러지게 됩니다. 이런 일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옛사람을 수술하는 말씀으로 받지 않고 자신의 외형만을 다듬고 가꾸는 율법 또는 윤리도덕으로 해석을 하고 앉아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동안은 자신의 옛사람은 100%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의 천적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것을 인간의 윤리도덕으로 바꾸어 자신에게 적용하니, 옛사람은 만수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형이 불순종하다가 광야에서 시체가 엎드러진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계명인 율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곧 불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일을 우리에게 할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히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고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스스로 작용하여 말씀 받은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율법이나 윤리도덕에는 스스로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부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생명의 자라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말씀]
  율법적 교회에서는 교인의 신앙생활에 교회차원에서 일일이 간섭을 하고 참견을 합니다. 목사님에게 가서 기도 받고 무슨 장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신이 지금 기분 나쁜 일이 있는데 무엇 회개할 일이 있는가? 없는가? 새벽기도는 해야 하는가? 등등 그 하나 하나를 기도 받고 코치 받습니다. 이것은 선포된 말씀이 율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 주어야 외형적으로나마 믿음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피차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믿음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복음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스스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마음에 깨달아 받으면 그 안에서 역사합니다. 계속 생각나기도 하고, 말씀으로 인하여 갈등을 느끼도록 하며 우리에게 작용을 합니다. 말씀이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갈등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에 의해 붙은 불은 더욱 더 타 올라서 고쳐야 할 부분을 태우고 고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합니다.
  [고전3:6-7]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자신은 심었고 다른 교역자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말씀의 씨를 심고 연이어 말씀의 물을 주는 것으로 그들의 일은 끝입니다. 이제는 말씀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 스스로 일할 텐데 이것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이 자라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참된 말씀이 이와같이 스스로 일을 하는데 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는 율법은 모든 것이 명령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대로 자신도 따라 하고 남도 그렇게 따라 하게 만들려다 보니 일일이 간섭해야 하고 할 일도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모으는데 목사님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친화력이 큰 작용을 합니다. 또한 좋은 마케팅기법을 교회에 도입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쉴 사이 없이 개발하여 적용함으로 어느덧 교인들을 교회에 붙잡아 두는 것이 일생 일대(?)의 목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 한번 출석 안하면 바로 다음날 담임 목사님이 심방 가서 달래야 하고 혹시 교인이 시험이 들지 모르니 경조사에는 필히 참석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를 이끄는 것은 교회를 생명체로 알지 못하고 세상 조직체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생명이 자라는 곳이지 사람을 모으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생명이 자라면 자연히 사람들도 모이게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인이며, 주님이 운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인도해야 성공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이 아직도 인간적이 방법에 의해 교인수 늘리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성장한 교회 목사님들은 교회성장세미나에 강사로 불려 다니기에 바쁩니다. 교인들 많이 모아다 놓고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 율법과 불순종은 하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불순종하게 된 이유는 성경말씀을 윤리도덕으로 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이라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순종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율법으로 이해하고 행하면 그것이 곧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성경을 율법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그것이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합니다.
 
  [구분함]
  우리는 어떤 것이 자신이 버려야 할 옛사람의 것이고 인간적이며 혼적인 것인지 또는 어느 것이 영적인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서로 섞여 혼돈된 모습입니다. 영적인 것이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상관된 것을 말하고, 혼적인 것이란 이 세상에 상관된 것을 말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 둘을 구분할 수 있게 역사하십니다.
 
  -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죽으러 간다고 하셨을 때에 그러시면 안된다고 만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마16:29)" 하며 책망하셨습니다. 이 경우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베드로가 구분을 하지 못했던 것, 즉 무엇이 영 (하나님의 일)이고 무엇이 혼 (사람의 일) 인지를 구분하여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마음 아픔은 필수
  예수를 죽자 살자 따라 나섰던 베드로는 이런 책망을 받게 되었을 때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고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만큼 깊숙히그리고 확실히 영과 혼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말씀이 제대로 역사를 하지 못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아픔은 필연입니다.
  일반적으로 말씀의 역할은 세상에 힘들고 지쳐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입니다. 말씀을 따르다 보면 그 과정에서 아픔을 겪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도중에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말씀의 본질을 익히 알기 때문에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인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2.3 분별해 내고 드러냄 (히4:13)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옛사람을 드러내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받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 자신의 옛사람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의 혈기, 집착, 물질욕,소유욕, 명예욕, 인정, 왜곡된 성격의 근본 뿌리 등등...
 
  율법은 이런 것들을 억제하도록 합니다. 자신도 또한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참고 또 참습니다. 힘겨운 싸움입니다. 이런 결과 외형적인 면으로는 어느 정도 그런 행동이 억제 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속으로 잠복한 것 뿐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소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힘겹게 참고 있는 우리들 속의 숨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혈기를 여간해서 부리지 않는데 이 일 저 일 짜증나는 일이 겹치게 되면 혈기를 부리게 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며 이런 것들이 다 처리가 되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게 되면 그렇게 쉽게 깨끗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은 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을 시인하고 주님께 회개하는 자는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드러난 것을 부인하고 남의 탓, 상황 탓으로 돌리면 다시 잠복하게 됩니다.
 
  옛사람의 소유인 것들은 말씀에 의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 과정이 연단 과정인 것이고 거기에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아픔을 잘 견디어 안식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옛사람을 드러내는 주님의 방법]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활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의 옛사람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때 상대방을 원망하지 마시고 자신에게서 무엇을 드러내고 구분하고자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가? 생각하고 그 뿌리를 찾아내고자 함이 마땅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상대방에게 돌리면서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하다가는 그 좋은 치료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 가족다툼
  여러분도 가족과 싸우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인데 그 모든 것이 각자 상대방을 통하여 자신의 고칠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받은 말씀이 실 생활에서 체험 되는 과정이며, 이런 아픔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사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자는 복됩니다. 믿는 가정이라고 다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그러나 믿는 가정이 믿지 않는 가정과의 싸움이 다르고 복 되려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옛모습이 드러나고 시인하여 고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봉책으로 "내가 참지..." " 참을 인자 3개면 살인도 피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으세요. 그러나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그것은 참지 못해서 그렇겠지요.
  이 경우 싸움이 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둘 사이에 유익이 있으려면, 그것은 통하여 자신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려고 하셨는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부부싸움을 통해서 주님은 자신의 어느 부분을 드러내 고치려 하는지 그 손길을 찾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시인할 것]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옛사람의 행위가 드러났을 때 이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고쳐집니다. 그러나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느냐?' 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고침 받을 좋은 기회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단이 길어지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옛사람이 드러났을 때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에 그 문제가 다시 드러날 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시고,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고 회개하면 고침을 받습니다. 그것이 옛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 상대가 용서됨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지기 때문에 심한 말을 서로 막하게 됩니다. 세상 가족들은 그런 말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한이 맺히고 다시는 보지 못할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옛사람을 드러내기 위해 쓰임 받은 것 뿐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면 넉넉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3. 맺는 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사람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말씀의 역사함의 특성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자신도 모르게 피하게 됩니다. 피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바꾸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말씀에 의한 연단이 있을 때 자신의 버려야 할 옛사람을 직시하지 못하고 상대방 탓으로 돌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속게 되면 저 안식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의 옛사람의 궤계를 잘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연단의 때마다 잘 견디면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십시다.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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