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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서로 사랑하라 (요13:33-38)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09-04 12:37 조회 |4,005회

본문

서로 사랑하라 !

[요13:33-38]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1. 들어가는 말
 
[ 혼란지경]
어느 분들은 자유교회의 말씀을 들으면 사랑해야 할지 또는 사랑하지 말아야 할지 혼란지경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랑을 누가 하라고 해서 하고,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분들은 기존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익히 들어 왔던 터라 자유교회에서도 그런 류의 말씀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연 이 분들의 이런 푸념은 옳습니다. 자유교회에서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하지도 않고 또한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에 관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또는 기존 교회로부터 숱하게 사랑하라는 계명을 들어 왔던 이들로서는 당연히 이곳에서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줄 것으로 무심코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의 말은 없고 이상한 말(?)을 전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사랑하라는 말인지 사랑하지 말라는 말인지 혼돈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한 말(?)이란 곧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길과 사랑하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기대하고 있는데 길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니 언뜻 주파수가 맞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주님이 사랑하라 하시는 것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은 허비되는 것입니다. 장님에게 글을 읽으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을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커다란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가끔 사랑하는 것을 잊어 버리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랑하라고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글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주님은 사랑에 관해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베드로를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밝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개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세족식을 끝내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잠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나,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가 없다. 새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 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까? 당장 주를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에 주님은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느냐? 네가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방향]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가는 곳'의 의미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뜻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문 설명
 
2.1 예수가 가는 곳 (요13:33,36)
[요13:33,36]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따라 올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앞두고, 전에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너희들도 내가 가는 곳에 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해당 성구는 아래와 같습니다.
 
[요7:33-36]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여기서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 있는 곳'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내용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은 결국 '너희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올 수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는 이유]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물리적인 장소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육신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영적인 면에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 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가는 곳에 지금은 베드로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왜 따라 갈 수 없었을까요? 죽음까지도 불사한다고 했으니 예수를 위해서 같이 죽으면 예수가 간 길을 따라 간 것 아닐까요? 순교할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때 예수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그들은 예수가 간 곳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은 그들이 따라 올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예수가 간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를 위해 순교를 한다해도 무의미합니다. 이런 순교는 순교가 아닙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이 상태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다 해도 예수가 가는 곳에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후에는 따라 오리라'는 말씀을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후에는 따라 오리라]
'지금은 따라 올 수가 없고 후에는 따라 오리라'는 말씀에서 '후'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가 가는 곳에 따라 올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가 가는 곳이란 일단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예수의 삶 전체를 말합니다. 예수의 삶은 제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함으로 그들을 살리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제자들은 바로 이 예수가 한 일을 자신도 하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가 간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와 같이 자신들의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또 그들의 옛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희생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새생명을 주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가 간 곳에 간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가 간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의 상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2 서로 사랑하라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이 주신 명령으로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서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늘 하늘만 쳐다보고 예수만을 생각하며 숱하게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사랑해야지...' 하는 환상 속에 있고 그렇게 20-30년을 살아 왔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미혹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길]
예수님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서술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그것은 과정을 거쳐서 내가 너희 안에 성령으로 임할 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길을 말합니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길 말입니다. 자유교회의 말씀이 이런 흐름이니 타 교회에서 되지도 않는 율법적 말씀을 듣고 자랐던 분들은 과연 사랑하라는 말이냐?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냐? 하고 혼란지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단을 바라보며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대하고 있는데 전혀 엉뚱한 '길'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혼동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혼동 하루 빨리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직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주를 위해서 죽겠다고 했을 때 그것이 자신의 사랑표현입니다.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너는 사랑할 수 없다. 내가 간 사랑의 길을 갈 수가 없다. 그러니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같은 자리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지금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이 더 이상 헛된 명령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지금은 제자들에게는 무의미한 계명이지만, 후에 
성령이 임한 후로는 사랑이 흘러 나오기 때문에 참다운 계명이 됩니다. 같은 계명이지만 이 계명의 의미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명은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된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냥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했을까요? 그들을 위해서 발을 씻어주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먹을 것을 마련해 주고, 또한 육신의 질병을 고쳐 준 것이 그들을 사랑한 내용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을 본 받으려면 어떤 행함의 문제에 얽매일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말씀을 받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또 그 과정에서 그들의 옛사람과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로 감으로 그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이것이 예수가 사랑한 것 같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전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들이란 말씀을 받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말하고 이들이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어 거듭나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 말씀을 받는 자들의 옛사람과 연합하여 십자가로 가야 하는데 이것이 '죽은 자를 위해서 바울이 받는 세례'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죽은 자들이 거듭나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세례란 물에 잠기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예수님의 말씀으로 증명이 됩니다.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의 제자 된 증거]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사랑을 보여야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공자식 윤리도덕을 사랑으로 착각하거나, 또는 불교의 자비를 사랑으로 오해하고 행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이것이고, 이것은 어떤 행함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서 자라나야 할 수 있는 생명현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명현상에 입각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바로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나의 제자인 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오직 말씀을 가지고 전심전력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려고 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사랑에 대한 막연한 윤리도덕적 시각들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참다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은 자신이 먼저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2.3 우리의 사랑 (요13:37-38)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용]
베드로는 자신이 사랑할 능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말하는 그 사랑 얼마나 허망한 것인 줄 아느냐? 목숨을 버리겠다는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고 도망할 것이다라고 하셨고 과연 베드로는 예수가 힘 없이 잡히는 것을 보고 배신하고 도망했습니다. 
 
[객기 사랑]
우리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인식으로 성경을 대하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 출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3년 반이나 예수를 따라 다닌 베드로도 사랑을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거친 후 거듭난 사람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직접 만나서 교육(?) 받은 베드로가 이 정도이니 우리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채 자신은 사랑을 안 해서 문제이지 마음만 먹으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흥회에 찾아가서 은혜 받고 나면 '그래 열심히 한번 사랑해 보아야지...' 하지만 하루 이틀 또는 한 달이 채 못 가서 약발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원이나 부흥회 찾아가서 그럴듯한 설교와 찬양을 듣고 와서는 사랑해야 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도 잠깐... 얼마 안 가서 다시 시들해 집니다. 이런 식의 사랑을 벌써 몇 십 년째 계속해 오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문제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길을 보아야...]
이제는 그런 무모한 객기 사랑은 그만하십시오. 이제는 그런 사랑이라는 말에 미혹되지 마시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길을 제대로 보고 가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3. 맺는 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안 되는 사랑을 하려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다. 오직 말씀 속에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길을 다 가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로 인하여 예수의 참 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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