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PW AUTO 
 

  새소식 칼럼 말씀 기획연재 대화실 자료실 교회안내 기독서원학개 전도자들
영어사이트
교회학교
 
 
[관리자] 2024. 0421 주일…
[관리자] 2024. 0414 주일…
[관리자] 2024. 0407 주일…
[관리자] 2024. 0331 주일…
[관리자] 2024. 0324 주일…
[관리자] 2024. 0317 주일…
[관리자] 2024. 0310 주일…
[관리자] 2024. 0303 주일…
[관리자] 2024. 0225 주일…
   
 
 
 
 
하나님께서 주신 꿈 (1)
폭포의 꿈 (1)
1월 18일"선한사마리… (1)
방언에 관하여..... (1)
몰렉신 상징성
답변글 몰렉은 내가 만든 예수 (3)
 
        

제목 | 포도주에 취한 노아 (창9:18-27)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09-15 18:32 조회 |5,254회

본문

포도주에 취한 노아

[창9:18-27]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1. 들어가는 말

[두 종류의 사람과 세상]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두 세상이 중첩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을 성경은 '보이는 세상'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고후4:18).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성경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 있을 때 들어간 사람은 결국 두 나라를 이중으로 살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 속해서 세상의 법칙에 의해서 보고 말하고 듣고 하면서 살게 됩니다. 보이는 세상만을 보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람들의 언행이 미련해 보이고, 터무니없어 보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참된 삶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사는 자들의 것입니다. 이들을 영에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영적인 세상을 보는 영에 속한 자들과 그것을 보지 못하는 육에 속한 자들의 축복과 저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개요]
노아시대에 홍수가 나서 온 인류가 다 멸절을 당하고 오직 노아의 식구 8명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노아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들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그 중에서 성경은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부가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 벗고 누워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와서 두 형제들에게 고했습니다. 아버지가 추태를 부린다고...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 쳐서 장막으로 들어갔고 옷을 취하여 노아의 하체를 덮어주고 보지 않았습니다. 술이 깬 후에 노아는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반면 자신의 하체를 덮어 주었던 셈과 야벳을 창대케 하는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생각할 점]
여기서 보면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것은 분명한 잘못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지적한 함은 오히려 저주를 받았고, 그것을 덮어 준 셋과 야벳은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와 하나님은 이 일에 있어서 같은 편이라는 말인데...
또한 함이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지적해 준 것이 얼마나 큰 죄라고 자손에게 저주를 내릴까요? 노아 자신도 그렇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생각을 해야지 괜히 엄한 함의 아들만 저주를 받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함이 잘못했다 손치더라도 그 일 하나로 어떻게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저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의문점입니다.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2. 본문해설

2.1 노아의 과실? (창9:20-23)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완전한 자 노아]
노아는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창6:9-10). 이렇게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노아는 거듭난 자의 모형입니다.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한 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우리 육신에 속한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런 행동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심이 있고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술에 취한 노아]
노아의 행위를 육신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장막에서 술 취해서 하체를 드러낸 것 그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이런 행동에는 영적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마시고 취한 포도주란 일반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의 포도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성령에 충만하여 보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비롯하여 함의 눈에는 일반적인 포도주를 마시고 술취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 일행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행2:11-15]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5/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아 성령에 취한 베드로와 120문도들의 행동이 육신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술취한 행동으로 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건을 놓고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지금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 남은 모습은 말씀의 물로 침례를 받은 것을 상징하고, 포도주에 취한 것은 성령이 그의 몸에 임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이 모습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예표 하고 있습니다.

[홈피사건]
우리 교회의 경우를 한번 봅니다. 홈피 사건으로 몇몇 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처음 이 사건이 발발했을 때 어리둥절한 분들이 많았고 그때 많은 분들은 목사님이 좀 더 잘 감싸주고 인내해 주지... 하는 동정론이 있었습니다. 결국 목사님이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더 좋은 일이고,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를 설명을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해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일을 육신적인 시각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사안을 놓고 하나님과 자신의 시각이 왜 그리 다른가요? 그것은 자신의 사람됨의 문제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적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함의 반응]
함은 아버지가 술 취해서 장막에 벌거벗고 누워있는 것의 영적 의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보고 나와서 형제들에게 고하며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홈피 사건의 영적 배경을 보지 못하고 목사님을 판단하는 육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말입니다.

[셈과 야벳의 반응]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노아의 하체를 보지 않고 뒷걸음질 쳐서 옷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면 노아가 한 행동의 참 뜻을 알고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지 않고 덮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것이 우선이고 그로 인해서 육신의 세계에 드러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홈피사건을 보면 교회 내의 갈등으로 비치는 것이 보이는 세상에 드러난 모습입니다. 함의 눈에는 갈등 자체만 보였고 그래서 '은혜로운 홈피가 되었으면...' 어쩌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이 사건의 영적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 보이는 갈등 그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덮고 지나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체를 옷으로 가린 행동의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드러냄

[노아의 행함이 심판의 계기가 됨]
노아가 한 행동에 대한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함은 외형만 보고 육신적인 눈으로 판단했고 셈과 야벳은 노아의 행동의 영적 배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의 이런 행동은 함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냈고 셈과 야벳은 영에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실제로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창9:18) 가나안이라는 말은 '장사꾼, 상인'이라는 뜻입니다. 장사꾼이란 무엇이든지 대가가 없으면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 세상의 거래 근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랑도, 봉사도, 구제도, 모든 것을 보상을 바라고 하니 모두가 장사꾼입니다. 결국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는 말은 함이 그렇게 세상적이고 육에 속한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함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냈고, 셈과 야벳이 영에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2.3 축복과 저주 (창9:24-26)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내용]
노아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즉 그 일이 지나고 나서 아들들이 자신에게 한 일을 놓고 이제 심판을 하여 복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서 형제들의 종이 되리라고 했고, 셈과 야벳을 창대케 하시고 가나안을 그들의 종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대로 그대로 해 주셨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주와 축복의 근거]
여기서 노아의 세 아들이 축복 받고 저주 받는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노아가 벌거벗을 것을 덮어 주어서 복 받고 또는 그것을 비방해서 저주를 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 대한 행동을 놓고 노아가 축복과 저주를 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보는 눈을 심판한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행동에서 영적인 내용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판단하고 비방한 것이고, 셈과 야벳과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외면하고 덮어 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함은 육에 속한 사람이었고, 반면에 셈과 야벳은 영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노아가 함을 별도로 저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함은 이미 육에 속해서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번 사건으로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뿐입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이미 영에 속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축복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이전에 이미 복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
함이 말씀을 받기는 받되 인간의 윤리 도덕으로 받아서 아들을 낳게 되면 가나안을 낳게 됩니다. 그 가나안은 곧 함 자신입니다. 함뿐만 아니라 우리도 말씀을 윤리도덕적으로 받아서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가나안이 됩니다. 이 가나안은 우리 자신인데 장사꾼의 본질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가나안은 당연히 저주를 받은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세상의 생명 그대로니까 그렇습니다.

3. 맺는 말

[노아의 완전성]
노아의 가정은 현재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교회의 목사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뜻 동의하기 싫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함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떠나 가신 분이 애타게(?) "목사님도 사람이니 실수할 때가 있다. 내가 과거에 환상을 보니 목사님도 교만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씀이 아주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기회를 원천적으로 무효화 시킵니다. 그 말은 목사님도 실족할 때가 있으니, 내가 목사님을 감시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목사님 위에 앉게 되는 것이고 목사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옛사람이 처리 받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옛사람은 안전하고 그 결과 자신은 저주 받은 함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목사님을 신뢰해야 하는데 99%만 한다 해도 그 1% 때문에 함의 길을 갈 것입니다. 100% 신뢰해야 셈과 야벳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0% 신뢰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럴 수 있습니다.

[드러냄]
인도자의 어떤 행함이 교인들의 보는 눈을 드러냅니다.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이때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를 해야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나 홈피에서는 눈에 낯설어 보이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어디에 속할 것인지 분명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자신이 함으로 드러났다면, 회개하고 말씀 앞에 서면 됩니다. 그러면 점차 셈과 야벳의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셈과 야벳의 시각을 소유하여 그들과 같이 창대케 되는 복을 누리시기바랍니다.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댓글목록

shama님의 댓글

shama 작성일

목사님 안녕하신지요?  온맘토론장에서 온 샤마입니다.

목사님께 더 많이 배우기 위해 가입하고, 많은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으시는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목사님의 설교글과 컬럼을 읽던 도중,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여쭈려합니다.  이 부분이 계속 걸려서 목사님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군요...

목사님께서 윗글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노아의 가정은 현재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교회의 목사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뜻 동의하기 싫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함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물론 윗글 후반부는 목사님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성도들과 목사님 간의 대화이므로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판단을 하기가 어려우나,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인용된 부분)만 두고 볼 때에는,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목사님은 완전하다.. 그렇게 세우셨다.. 동의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

이런 요지의 말씀은 '진리'가 아닌 '또 하나의 구도자일 뿐인 목사님'을 우상, 신격화 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교회의 대부분 목회자들은 그러한 표현에 아얘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구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말씀, 즉 진리입니다.  그 진리 안에서 목사님도 강조하신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와 함께 져야 하는 것.. 임을 선포하시는데 반하는,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닐지요?

모든 성도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대제사장이 되어야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아야하고 기름부음 받아야 합니다.  목사님은 깨달아 삶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역시 대제사장, 즉 그리스도로 만들어주는 '인도자 / 선지자 / 말씀전파자'의 역할일 뿐입니다.  목사는 특별하다...라는 의식은 구약적 의식임을 목사님도 아실텐데, 어찌 이런 글을 쓰셨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는 수정을 하시거나 삭제를 하시는 것이 필요없는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씀 드립니다.

Epistles of His님의 댓글

Epistles of His 작성일

자유교회의 한 성도로서, 샤마님이 올리신 글을 읽고 제 생각을 올립니다.

우선, 목사님께 질의를 올리신다고 하셨는데, 글 내용을 보니
질문이 아니라, 글은 이렇게 쓰라고 아예 머리 위에 앉아서 훈계를 하시는군요.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시고 형제님을 목사님과 연결되게 하시고
이곳 교회 홈페이지까지 와서 글을 읽게 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끄신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께서 주신 글 앞에서
자기 주장은 내려놓고,
겸손하게 말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주장하는 내용이,
목사님도 님과 같은 수준의 구도자일 뿐이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 같군요.

지금까지 님이 만난 목회자님들은 그랬을지 모릅니다.
우리 다 죄인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으니 겸손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자.
그런 말씀 들으면 마음에선 우리 목사님 겸손하시네. 본받아야겠어 하셨겠죠..

하지만 목자는 양과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양을 이끄시는 분이 목자이시고 예수님으로 대표됩니다.
그런데 그 목자되는 분이 양처럼 길 모르고 헤멘다면 제대로 된 목자겠습니까?
목자의 탈을 쓴 또 다른 양일 뿐이지요.
인간적인 겸손이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예수님, 베드로, 바울 등 많은 분들이 목자로서 하나님과 한마음 되어 일하시고 사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사님이 스스로 특별하다고 주장한다고 한들
사람의 지혜가 얼마나 출중한데 그런 말을 듣겠습니까?
우상화 신격화요?
다들 형제님처럼 목사님 위에 앉아서 자기 생각에 따라 설교 판단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글을 읽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님의 마음의 생각이 더 우상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덕영 목사님 온전케 하시고 교회 목사님으로 세우셨습니다.
저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목사님께서 과연 그러하심을 깨닫고 있으며
또 교회의 삶을 통해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는 상식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추가로, 오해하신 부분이 있는데요..
동의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한다면, 볼 수 있는 눈이 형제님에게 없다면
님은 이미 처해 있던 저주 밑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정덕영님의 댓글

정덕영 작성일

Shama님,

이곳까지 방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한 것을 수정하거나 삭제 하는 것이 오해를 사지 않을 것 같다고도
충고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정이나 삭제를 한다고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 삭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함

우선, 목사님을 100%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100% 순종하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님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을 세워서 역사하신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목사님이 완전하다는 것은 세상적인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세우신
그 목사님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야 자기 말씀을 맡길 때 어중어 떠중이에게 다 맡기겠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맡길 때야 하나님 같이 완전하고
하나님 같이 거룩한 자에게 맡기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님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님인지 응답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시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목사님이 잘 하는 것 같으면 순종하고,
못하는 것 같으면 개혁해야 한다고 데모하고 하면,
님 자신을 고칠 기회를 잃어 버린 채 신앙생활하게 되고,
님이 그렇게도 원하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은 태도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옛사람이 주는
옳다함에 속아서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평생 그렇게 예수 믿다가 예수와
하나되지 못하고 인생 마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셔서 세우신 목사님을 알고
그 분께 100% 순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억지 순종이 아닙니다. 비진리의 무지한 자가
자기 옳다함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진리의 말씀을 가진 목사님과
충돌하면 튕겨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순종하고 자신을 꺽고
말씀 앞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자신의 무지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순종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이치적 순종입니다.

2. 예수님의 완전함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는 나의 사랑하는 자이고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의 말씀이 좋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도 알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옛사람의 노예인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입니다. 잡힌 자는 자신이 잡힌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그것을 지적해 주는 말씀을 가진 자가 필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아픈 지적에 참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네가 나보다 잘났냐?"하고 들고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해서 올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려고,
잡힌 그들로서 당연히 보이게 되는 위선적인 구제, 금식, 기도하는 것을
책망하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위선적인 행동들이 주는 세상 이득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라는 일이고, 선한 일, 옳은 일을
했는데 그것이 왜 위선이며, 예수를 거부하고, 비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요, 응답 받는다고 자기 안의 하나님과
내통하는 귀신들린 자요, 술주정뱅이요, 욕 잘하는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실제로도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고 술도 마셨고
마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완전하다고
인정하시는 분이다는 말을 듣기도 싫었고 들어도 안 믿었습니다.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오히려 참람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이렇게 육신적으로 보고 판단하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실족하고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의 벌거벗은 모습(육신의 흠--윤리도덕적 판단)을 보고
판단했던 저주 받은 함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에게 100%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너무나 합당합니다.

3. 만인 제사장

님도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때 님도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될 것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이 보기에 완전한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이고, 어떤 때는 아니고, 하면
이는 고침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지 않고, 또한 세울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운 자는 100%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이고,
또한 그를 100% 순종하고 따라 나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목사님만 특별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고 따라 나서야,
하나님과 한 마음되고, 그때, 목사님이고, 순종한 성도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한 마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가 성도도 제사장으로
거듭났을 때입니다. 처음부터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경우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처음 만나서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을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100% 순종하며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로부터
어떤 심한 소리를 듣고 지적을 받아도 끝까지 예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혹 부인하고 저주했다가도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이 100%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오순절에 비로소 그들도 제사장이 되었고,
사도들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만인 제사장설이라고 너도 나도들 말하는데, 자신이 실질적으로
제사장이 되고 난 다음에야 그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 무슨 뜻인줄
알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제사장이란 단어에 미혹되어서
너도 나도 제사장 할려고 하면, 언제 자신이 제사장으로 고침 받고 자라날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이미 자신이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사님께 100% 순종하라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성도 위에 군림하기
위한 절대 권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신 모양입니다. 오해 하셨습니다 .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기 훨씬 이전에 손을 놓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형제들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삶을 삽니다. 
그리고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에게
순종해야 그 나라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옛생명을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이것은 한번에 다 설명이 안될 것입니다.

4. 구도자는 생명을 줄 수 없다.

흔히들 도닦는 사람들이 "도반들이여, 너도 나도 다 진리를 향해서 가는
구도자들이다, 너나 나나 모르는 것은 같다. 함께 이 길을 떠나자" 하며
미혹하는데, 그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 보지 못한 도를 어떻게 남에게 전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일까요?

구도자는 도를 찾는 과정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도를
찾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도를 지식적으로 가르칠 수 있으나
그 도 자체, 즉 생명은 줄 수 없습니다. 도를 찾은 사람만이 도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기 이전에는 구도자이지만,
예수를 만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다음에는 그는 진리와
하나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진리를 통하여 형제들을 진리의 길로,
구원의 길로, 죄사함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쓰임 받아 그 예수가 했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일만 스승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아비는 많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동일합니다.

5. 하나님을 알아야 예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안에 담고 오신 육신의 예수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놓고, 이는 내가 기뻐하는 자, 사랑하는 자니
너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던지 말던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종국적으로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과의 교통함 없이 믿으면 예수를 육신의 예수로 밖에
보지 못합니다. 예수는 사람 안에 하나님을 담고 있는 분이기에, 하나님을
알아야 예수를 알 수 있습니다. 

6. 안심하십시오.

님의 글 속에서 여기 목사님이 잘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씀이 여기 있기에 아끼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 마음 감사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님의 원대로 이미 여기는 잘 하고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입니다.
이제 문제는 님이 그것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받아 들이느냐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기도하며 행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shama님의 댓글

shama 작성일

두 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으나, 의미 없을 것으로 봅니다.

늘 진리 안에서만 걸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문서 목록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