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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주기도문4 (마6:9-1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10-03 22:32 조회 |5,142회

본문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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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용서하라!]
주기도문 4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12절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말씀은 쉽게 생각하고 읽으면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었으니, 그것을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의 죄 또한 용서해 준다고 하셨으니 형제의 죄를 예수의 은혜로 용서하여야 하겠습니다' 라는 요지의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 갑니다.

[잘 안되는 말씀]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담이 아니 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이라면 형제가 잘못할 때마다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한 2--30년 이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고자 했지만 지금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안됩니다. 이것은 좀 좋은 표현에 속하고 아예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해도 해도 안되다 보니 그런 상황과 타협하여 지금은 아예 용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기 일가친척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지금도 명절 때 모임에서 그 가족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서로 다른 날짜에 어른 집에 모입니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라는 말씀이 무색케 되는 경우입니다.
용서 안 하면 지옥 간다는 말씀을 읽고도 용서를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니 무슨 말을 더 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 주일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전하고, 그에 그렇게 하겠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돌아가니 문제입니다. 뭐가 은혜고 뭐를 그렇게 하겠다는 걸까요? 아무 것도 되는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은혜나 다짐은 전부 무효합니다.

[소속된 나라를 바꾸라]
예수님은 지금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한번 '용서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미 용서하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지도 못할 용서를 한 두 번이라도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무의미한 명령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하고 말고의 씨름을 하게 되면 천 년이 지나가도 그것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소속이 하나님 나라로 바뀌게 되면 나의 죄와 이웃의 죄가 일거에 해결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형제를 용서하는 문제를 통하여 우리가 죄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방향]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 나라를 양식의 측면에서 조명을 했고, 이번에는 형제를 용서하는 측면에서 조명을 하겠습니다.

2. 본문 설명
2.1 죄 지은 자란? (마6:12)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지은 자란?]
오늘 말씀을 읽히는 대로 읽으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과 같이 그것을 보고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죄'라는 번역된 헬라어는 '오페이레마'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빚'이라는 뜻입니다. 빚진 자는 '오페이레테스'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가 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진다는 의미는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도적질한 빚을 졌고, 사랑하지 못한 빚을 졌고, 형제를 판단한 빚을 하나님께 졌습니다. 이 빚이란 결국 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역 성경은 죄 지은 자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의미의 큰 손상이 없습니다.

[빚들]
또한 형제가 우리에게 죄지은 것, 즉 빚진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빚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파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집은 아내가 두 자식을 놔두고 3개월째 집을 나가서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집에 남아 있는 남편에게 부인이 그렇게 가정을 소홀히 했으니까 이혼을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런 경우 남편이 입장으로 볼 때 이 아내는 자신에게 큰 빚을 진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한 목사님이 구제를 잘 하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거나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목사님이 되어서 구제는 해야지... 기도는 해야지... 그것을 소홀히 한다는 말이야? 말도 안돼."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경우 목사님이 그 교인들에게 빚진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기회가 있으면 빚 독촉을 합니다. 겉으로든 속으로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구제 하셔야지요. 기도하셔야지요."
이와 같이 교인들의 눈에 목사님은 빚진 자이며, 죄지은 자입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들...]
또한 괜히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나에게 빚진 자입니다. 안경을 똑바로 쓰지 못한 빚을 진 자, 걸을 때 당당히 걷지 못한 빚을 진 자, 십일조를 안 하는 빚을 진 자... 등등 수도 없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한번은 가족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김건모라는 가수가 초창기에 귀걸이를 하고, 그것도 한 쪽에만,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괜히 그런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 쟤는 틀렸어, 남자가 무슨 귀걸이를 하고 그것도 한 쪽에만 한단 말이냐. 크게 되기는 다 틀렸다"
가족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얼마 후에 그는 '핑계', '잘못된 만남' 등의 대 히트곡을 내면서 거의 국민가수 수준의 인기몰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제 말을 기억하고는 그가 나올 때 마다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여튼 아빠가 안 된다고 한 가수는 꼭 뜬다니까"
이 일화에서 김건모 가수는 저에게 빚을 진 자였습니다. 그것은 법적이나 윤리도덕적인 빚이 아니라, 그냥 제가 정해 놓은 제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니 그것을 상대에게 빚으로 짐 지운 것입니다. 당시 그는 저에게 남자로서 귀걸이를 하고 그것도 한 쪽만 한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빚을 진 자들, 죄를 지은 자들을 모두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법적으로 자신에게 빚을 졌거나, 도덕적으로 빚을 졌거나, 그냥 주는 것 없이 미운 빚을 졌거나 이 모두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형제들을 모두 용서하고 빚을 탕감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왜 안될까요?]
우리는 그동안 나름대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 드렸다시피 잘 안됩니다. 10-20년이 그렇게 노력하며 지냈어도 우리는 형제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의 근본원인은 우리 자신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능력이 없는데 용서를 하려니 되지도 않고 허리가 휘는 것입니다. 용서하려면 먼저 자신을 살펴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 수영미숙
가끔 여름철 뉴스에 보면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어 갔다가, 물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 나고 구하러 갔던 사람만 죽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딸이 수영장에서 급한 소리를 내서 구하러 들어 갔다가 딸은 스스로 수영해서 나왔는데, 오히려 저는 딴 사람의 구조를 받아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신이 수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구하러 물에 들어갈 때는 과연 나는 구할 능력이 있는가? 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능력의 문제]
형제를 용서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 형제를 용서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형제를 용서하려고 긴 세월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형제를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능력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자신이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2.2 용서를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길
[마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내용]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였을 경우 몇 번 용서를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말한 일곱번은 아주 높이 잡아서 말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의 일흔 배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한번도 힘이 들어, 그것을 평생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직 일곱 번하면 되겠느냐고 말한 베드로가 우러러 보일 뿐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의미]
예수님은 여기서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70x7) 490번 까지라고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미 일곱 번 이상 용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서 490번이 회수로서의 의미는 이미 무의미합니다. 또한 어떤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한히 끝없이라는 개념도 아닙니다. 490번이 무의미한데 '무한히', '끝없이'라는 숫자는 더더욱 무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무의미한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숫자의 개념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 즉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로 자신을 옮기라는 말씀이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어떻게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는 다니엘서 9장24절의 말씀을 찾아 봅니다.

[칠십이레]
이 말씀은 흔히 우주 종말론에 자주 인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단9:24]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종말을 말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종말이란 우주 종말이 아니라, 나의 옛사람의 시각으로 보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임하는 시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 임하는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말씀은 칠십이레가 지나면, 우리의 죄가 영원히 속해지고,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되니, 결국 내가 죄사함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칠십이레란 70 주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70x7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형제의 죄와 빚을 탕감해 주려면 한번 두번 참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나에게 칠십이레(70x7)가 지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형제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용서해 줄 것이 애초부터 없는 그런 세상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칠십이레의 용서요,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입니다.
이런 능력이 생기는 것은 나의 죄가 영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형제들의 죄가 눈에 보이지 않고 그들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잠잠히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용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에게 임하면 할 수 있습니다.

[들보와 티]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형제에게서 빚을 받아 내려고 한다는 것은 곧 형제의 잘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제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를 보는 자신의 눈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형제의 눈에 티가 보이는 것이고, 형제의 행동에서 잘못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눈에 티가 보이면 먼저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들보를 빼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상태에서는 형제의 눈에 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여지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2.3 우리가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마6:12)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내용]
이제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을 잘못을 용서해 주었으니,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이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살펴 보았듯이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에서 왜 우리가 먼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말했을까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시나무]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습니다. 가시나무는 가시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가시를 맺지 못하고, 가시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하려고 20-30년 노력을 해도 안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으려고 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가시나무에 포도열매를 가져다가 꽂아 놓아도 그것은 포도열매가 아닙니다.
포도열매는 포도나무의 소산으로 달려야 포도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헛된 것이요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우선 가시나무인 자신이 포도나무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노력없이 자신에게서 포도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이와같이 어떤 나무에 포도열매가 맺혔다는 것은 가시나무가 포도나무로 변화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나무에게서 포도열매를 맺으면, 그 나무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나무로 변화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곧 내가 형제를 용서하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형제 용서함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의 시각에서 "네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보니 내가 너를 용서했다"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네가 형제를 용서하면 내가 너를 용서하리라"라고 표현됩니다. 깊이 묵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혹 이해가 덜 되시는 분들은 '무릎치며 읽는 성경' 315-318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해석이 이현령 비현령이라고 생각되시면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는요. 주님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을 제가 이해하는 방향대로 읽은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오히려 그런 표현을 하시는 주님께 감탄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맺는 말

정리합니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려면 사람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형제에게서 잘못이 보입니까? 용서해 주려 하십니까? 아직 용서할 사람이 안되었습니다. 용서할 능력자가 되면 자신의 눈에 용서할 형제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이 죄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만 가능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임해서 형제를 용서하실 수 있는 능력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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