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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주기도문5 (마6:9-1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10-11 16:19 조회 |5,315회

본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1. 들어가는 말

[쉽지 않은 하나님 나라]
오늘로서 이 주기도문 살펴보기를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은 어느 것 하나 근원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기는 문제를 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옮겨 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이고, 이것은 하나의 천지개벽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옮기는 문제는 사람으로써는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만 할 수 있습니다. 

[방향]
오늘 말씀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송영으로 이루어 집니다. 주기도문 전체 또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내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시험의 의미와 주님은 어떻게 이 시험에서 건져 주시는 지에 관해서 그리고 주기도문의 나머지 말씀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2. 본문 설명

2.1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6:13)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험]
우리가 흔히 시험들었다고 하는 경우는 예수 잘 믿다가 도중에 낙심하고 방황하는 경우를 두고 말합니다. 목사님이 하는 일이나 또는 조장,구역장과 부딪힘으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열심을 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놓고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그런 분들이 지금도 몇몇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들었다가 상담을 한 후 풀어지기도 하고 아니면 시험에 든 채로 그냥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험에 든 모습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말씀의 의미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한 두가지 일에 대해서 온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도 그런 단편적인 사안들을 놓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기도하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으로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는 그런 사람, 즉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됨을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시험의 근원적 문제 - 옛사람]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이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입니다. 영어성경은 '유혹(Temptatio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이나 유혹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요소인데 이것의 근본 뿌리는 우리의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의 유혹이 곧 시험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를 '시험하는 자' (헬라어:페이라존)라고 합니다 (마4:3, 살전3:5). 옛사람은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를 속이고 어그러진 길을 가게 함으로써 고난의 세월을 안겨 주는 실체입니다. 

우리 안에 옛사람이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어디서나 그의 시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어 넘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의 시험을 한 번 두 번 이겨낸다고 거기서 근원적으로 풀려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 나려면 그가 예수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기도할 내용이 그것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옛사람의 시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라는 말씀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처리되어야...]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시험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체험이 될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옛사람의 시험에 넘어지게 함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주는 것은 시련(헬:도키미온)이고, 옛사람이 주는 것은 시험 (헬:페이라스모스)라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도 동일하게 시험(페이라스모스)이라고 합니다(요6:6). 

- 고치기 위한 시험 
시험은 옛사람에게서 온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이 시험을 하느냐?는 문제는 이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시험의 요소인 옛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드러날 외부 환경을 조성하면 우리 안에 있는 유혹(시험)이 발동하고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을 놓고 하나님이 시험을 한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옛사람이 근본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시험을 해서 옛사람을 드러내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게 함으로 그로 인하여 속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시험을 허락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2 시험의 원천인 옛사람을 처리하시는 손길

[저의 간증]
- 좋은 것 주시고자하는 하나님
우리는 흔히 주님의 응답을 받기 시작하면 일거수 일투족을 응답 받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즉 실수를 하지 않고 옛사람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매번 응답을 받아 행하겠다는 그 마음가짐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 따로 나 따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분별력이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별력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시험을 하여 넘어지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위의 야고보서 말씀의 내용입니다. 

- 교만함의 시험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92년도에 주님을 만났고 그때 큰 소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98년도에 자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저는 생각하기를 주님을 만난 후 6년간 여러가지 연단을 받았으니 이제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이루어지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에 대 변혁이 일어난다. 주님이 그동안 나를 연단하시고 이제 그 일을 시작할 때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런 생각에 자신 만만할 때였습니다. 

- 사건내용
당시 어느 금요철야예배 때, 함께 시무하던 김목사님이 방언을 받지 못한 남자분들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몇몇 남자 집사님들이 아내들의 성화에 못이겨 앞으로 나갔고 그때 방언을 받게 하려고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하느라 무진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아직 때가 아닌데 억지로 방언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급기야는 방언을 받기 위해서 강대상으로 나갔던 두 남자 집사님들이 도중에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보고 정말로 너무 급하게 서둘렀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목사님이 안수할 때 눈을 누르는 것에 대해서도 심한 거부감을 느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도 그날 밤 내내 나의 생각을 목사님께 말할까 말까? 라는 문제로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말씀을 드림으로써 고쳐야 하겠다는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목사님이 어련히 주님께 기도를 해서 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주님께 기도를 했더니,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지 말라는 뜻인줄 이해했고 조용히 있기로 했습니다. 

- 끄집어 내시는 손길
다음날 아침 김목사님이 다른 일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얘기 도중 어제 철야예배 어땠느냐? 합니다. 뭐 괜찮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뭐 할말 없어요? 합니다. 
원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사님이 재차 할말 없느냐고 묻는 바람에 저는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고 참았던 말이라서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방언은 천천히 받게 하면 안되느냐?
안수 할 때 왜 눈은 누르느냐? 등등
말을 하자 저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목사님의 말이 싹 변하고 '그렇지 않아도 자신도 어제 방언은 조금 성급했다는 것을 알고 앞으로는 천천히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며, 눈 안수하는 것은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보니까 성경적이라고 하시면서 기분 나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같이 일 못하지...'라고 합니다. 아무튼 목사님은 기도해 본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내가 나서서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것이 싫으면 남의 입을 통해서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말했다.'
저는 당시 그 말을 한 것이 뼈져리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하나님이 세운 목사님인데 내가 기분 나쁜 말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서 잘 절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고, 무슨 할 말없느냐?는 시험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저의 억제하고 있던 교만함이 현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저의 교만을 처리하실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 욥의 경우를 생각하여...
이 일 이후에 주님은 어느 문제에 대해서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여쭈어 보면 '너 혼자 잘 해보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견딜 수 없어서, 김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제가 안해도 될 말을 한 것같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사과했습니다. 김목사님은 알았다고 이해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봐도 온전한 사과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여전히 저에게 냉랭하셨습니다. 
그때 욥과 욥의 친구가 생각이 났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을 판단하고 그랬었는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용서해 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기도때 교회에서 김목사님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를 해 주시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으로 "너를 겸손케 하기 위해서 그랬다"하시면서 너를 높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 선하신 손길
이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시험입니다. 저를 연단하여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선한 손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과 그 결과로 오는 어려움은 전부 우리를 연단하여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시험하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시험하시는데 다음 야고보서 말씀은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약1:13-15]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5/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것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던 그것은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미혹을 해서 넘어졌다 해도, 그것은 자신 안에 미혹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반응한 것이고 그래서 자신 책임인 것입니다. 제 간증의 경우도 외부 환경이 어떠 했던 그 말을 입밖으로 토설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할말 없어요?'라는 말에도 잘 참을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 자라남의 문제
우리가 어떤 시험을 받고 그것에 넘어지는 것은 그 부분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부분이 강하다면 외부에서 시험요소를 제공한다 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고 안 받고는 자라남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들은 조그만 돌부리에도 걸려서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같은 돌부리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부리는 어린아이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시험의 요소가 되지만, 장성한 자에게는 아무런 시험의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부리는 이 세상에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돌부리는 그냥 그렇게 세상에 있는 것이다. 어린 자는 그것에 걸려 넘어진다. 그것은 돌부리가 시험해서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어린 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편으로 우리를 시험하여 장성한 자로 만드시기를 원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의 이치로 그냥 그렇게 계신 분인데 어린 자들이 와서 스스로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 단계]
우리를 시험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우리에게 옛사람의 시험이 무엇인지 알고 밝히 보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옛사람에게 속아 넘어갈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을 견디며 예수를 따르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눅22:28-30]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옛사람을 드러내는 시험을 할 때 그들이 잘 견디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주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도 '옛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을 '시험 중'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정리]
시험에 들지 않게, 즉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그 시험을 직접 통과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는 기도는 결국 시험의 원천인 옛사람에 궤계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옛사람을 드러내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우리에게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험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악이란 헬라어로 "포네로스"로써 "악" 또는 "악한 자" 를 말합니다. 이제는 이 악이나 악한 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이자 사단 마귀인 나의 옛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옛사람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를 만나서 자신의 옛사람을 연단하는 손길을 느끼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앞 문장과 연계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옛사람의 궤계에 속아서 계속 실족을 하고 있는 그런 시험의 상태에 있게 하지 마시고, 그 죄악의 실체가 되는 옛사람, 즉 악한 자로부터 꺼내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일 수 밖에 없습니다. 

2.3 나라와 권세와 영광 (마6:13)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말씀은 고대사본에는 없다는 이유에서 괄호로 묶여 있습니다. 후대에 추가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하나님의 감동을 가진 사람이 했다고 볼 때 주기도문의 일부로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암기하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티'입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왜냐하면 영원에로 이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직역될 수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그것을 하나님께 구한 이유는) 영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고 권세 또한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말하는데 그것은 이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생명의 권세를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는 권세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그런 권세를 누리는 삶이 곧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생명의 나라에 있는 영원한 것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맺는 말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은 시험에 빠지게 하는 원천인 옛사람을 처리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옛사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옛사람의 시험을 허락하심으로 그의 궤계를 보고 고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악한 자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이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 영원한 나라이며, 권세이며,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기도문을 다 마칩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가 하루 속히 임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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