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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 아비가 죽으매... (행7: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4-10-18 22:19 조회 |3,638회

본문


그 아비가 죽으매...

[행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
 
1. 들어가는 말
 
[예수 믿는 목적]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내 안에 임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예수를 믿을 수 있지만 아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렇게 말하면 '아, 하나님의 나라는 좁은 문으로써 힘쓰고 애를 써야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이 좁은 문인 이유는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문과 길이 협착하기 때문에 좁은 문이 아니라,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문이 좁은 것이고, 길이 협착한 것입니다. 
 
왜 찾는 이가 적을까요? 지금 한국에만도 1200만 성도가 그 길을 찾아 나섰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떠났다가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은 우리가 분간해 내기 심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장애물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가게 됩니다. 
 
[장애물을 치워주지...]
우리 생각에 전능하신 주님이 그 장애물을 치워주지...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을 치워주시기 위해서 오늘과 같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말씀에 자신이 시인하고 동의하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이 장애물은 제거가 될 것이고,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 장애물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배경과 개요]
오늘 말씀은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라크 근방인 갈대아 지방의 우르에 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해서 가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그는 가나안을 향해서 가다가 그 중간지역인 하란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비가 죽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이 옮기셨다는 내용입니다. 
 
[생각할 점]
여기서 갈대아 우르는 세상의 상징이요,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직행하지 않고 하란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비가 죽은 후에야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대표로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서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지금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를 행했지만 바로 그 나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그 나라 문턱에도 오지 못한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란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놓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방해물을 제거해야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란의 의미와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하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던 아비의 죽음에 관해서 살펴 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문제입니다. 
 
2. 본문 설명
 
2.1 아브라함의 길 (창12:1-3)]
[창 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의 여정]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여정, 즉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은 우리가 세상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들이려 하는 것은 그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있다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가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을 때 이것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란에...]
아브라함의 여정을 살펴 보면 그는 가나안으로 여행을 하다가 하란에 머물게 됩니다. 지금 성경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갈대아 우르에 이어서 두 번째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란이라는 곳이 어느 곳이기에 아브라함은 복 받을 가나안에 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하란이란 상업도시로서 물질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로운 곳입니다. 부자 도시인 셈이고 그런 곳에 살고자 하는 사람은 비단 아브라함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하란에 묶어 두는 요소로 작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의미에서의 하란]
하란의 영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는 도시인 셈입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안주하기를 원하는 곳이고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이 곧 가나안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그 대가로 복을 받는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놓고 상업적으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봉사하니 주님이 가족을, 내 건강을, 내 사업을 지켜 주신다'는 차원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증 내용도 주님이 축복해 주어서 사업이 이렇게 번창하고 있다 또는 주님이 고쳐 주셔서 내 불치병이 나았다 주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렇게 교회성장이 되었다 는 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믿어서 이 세상에서의 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예수를 계속해서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은 참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지 이 세상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는 예수를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육신 세상의 축복만을 생각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만큼 관심 밖일 수 밖에 없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가는 도중에 하란에 머물고 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2.2 아비 데라 (행7:2-4)
[행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비 데라때문에...]
말씀에 의하면 하란에 안주하던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계기가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비 데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가나안)으로 옮기셨느니라" 
그의 아비가 죽었기 때문에 그가 하란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아비가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비 데라가 아브라함을 하란에 붙잡아 놓고 있는 요소였습니다. 
 
[아비란 누구인가?]
아비 데라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가 누구이길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로 작용을 했을까요? 
아비 데라는 아브라함을 낳았고 그에게 먹을 것을 대 주던 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아브라함이 기대고 의지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아비 데라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인 셈입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필요한 문제를 의논해 주는 자신의 의지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의미였습니다. 누가 아비를 건드리려고 하면 자신의 몸을 던져 보호하고 그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아비가 아브라함에게 있는 한 그는 하란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아비는 아브라함을 하란에 붙잡아 놓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도 이 아비에게는 속수무책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비가 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옮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압제하는 아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존재가 아비입니다. 아비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아비를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 아비가 자신에게서 멀어질까봐 노심초사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이런 아비가 있습니다. 
이 아비는 지금 우리에게 진짜 아버지일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또는 아내 일수도 있고, 또는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니 그것에 한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아비'가 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 아비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고 그 아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우리의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그 아비가 싫어하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억제해야하고, 자신은 극장가고 싶은데 아비가 오페라 가자고 하면 극장을 포기하고 억지로라도 따라 가야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비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고유의 아름다운 색깔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겉으로는 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양보하면서 살아 가는 것 아니냐고 멋있게 표현하지만 천만의 말씀, 솔직하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래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것이 아닌 색깔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부자연스럽고 괴롭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름다운 색깔을 위선과 거짓과 더러움으로 덧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겉다르고 속다른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죄인된 증거입니다.  
 
[독립하세요]
이렇게 우리에게 아비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위선과 거짓과 더러움이 없이 각자가 자신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영롱하게 빛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원래 색깔을 바래게 하는 아비, 그리고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라 꼬부라진 모습을 보이게 하는 아비를 끊는 작업입니다. 결국 자신의 본 색깔과 모양을 찾는 과정인 것입니다. 아비로부터 독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주님은 질투가 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비'에게 종속되면 자신의 아름다운 색깔이 퇴색시키게 되고 위선적으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고유의 색깔을 찾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개개인은 각자 색깔이 다르지만 아름답지 않은 색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아름답지 못하고 추한 색깔은 오직 위선으로 가식으로 덮여있는 색입니다. 아비로부터 독립하게 되면 이제 자신 고유의 색깔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비인 남편과 함께 살아도 그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도 자신을 더욱 더 고상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기 좋게 창조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므로... 예전에는 의무감에서 사랑했다면 이제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자신에게 아비역을 담당하고 있는 남편을 미운 눈빛으로 보지 마십시오. 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고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그런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 순종하십시오. 이 글은 그런 주님의 손길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이 손길을 느끼지 못하시면 기다리십시오.
 
아브라함의아비가 죽자 그를 가나안으로 옮겼다는 말씀은 곧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아비가 죽어야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2.3 아비 데라의 죽음 (창7:4)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나님의 게획]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도중에 하란에서 머물고 있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은 그가 의지하고 그를 붙잡고 있는 아비 데라를 죽이는 것입니다. 죽인다는 것은 육신적인 살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데라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데라가 죽은 것입니다. 
 
[데라의 생존여부]
실제로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곳이 이 부분입니다. 스데반은 아비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다고 했지만 그것에 의문을 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기록을 보면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고(창11:26),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습니다(창12:4). 그렇다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데라는 70+75=145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32절은 데라는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비 데라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죽지 않았고 그 뒤로도 60년을 살았다는 계산이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아비가 죽자 떠났다고 하니 그것이 맞는 것이냐?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어떤 분들은 아브라함이 장자가 아니었다는 가정하에 데라가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고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억지 같은 느낌입니다. 
아무튼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스데반이 지적한 대로 아비 데라가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죽은 후에야 하란을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비 데라를 하늘과 같이 생각했던 것에서 탈출하고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데라가 살아 있을 때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계획]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보다 아비를, 그것이 아내던 남편이던 자식이던 의지하는 사람들은 아직 하란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은 나는 주님을 더 의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의뢰해서 자신의 아비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비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님이 필요한 것이니 주님보다 아비가 더욱 더 그에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진정 자신이 주님을 더 의지한다면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구했을 것입니다. 
 
[아비를 끊게 함]
아무튼 이렇게 음으로 양으로 자신을 속이면서 아비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흔드실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아내에게 의지하는 남편에게 독립시키고자 하실 때, 아내가 남편에게 참지 못할 행동이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할 상황을 계속 연출하십니다. 
  역으로 남편에게 의지하는 아내에게는 남편이 갑자기 이유없이 완악해 지고 자신을 무시하고 억압합니다. 참고 참아도 한계가 있는 법, 함께 부딪혀서 싸워도 보지만 천만에 남편은 더더욱 강하게 나와서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십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마음적으로 끊지 못하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는 상황을 조성하십니다. 그래서 아주 철저히 끊을 상황으로 말입니다. 
 
[현명한 대처]
많은 분들이 걱정합니다. '아니, 그래 가지고 어디 가족이라고 남아 나겠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하며 사는 이 세상은 보다시피 하루에 500쌍 가까이 이혼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비로 부터 독립시키고 철저히 끊기를 원하시는 것은 더욱 더 견고한 관계를 주기 위함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어 남편을 볼 때 굴절되어 보이고, 남편 또한 자신에게 종속된 아내를 볼 때 아내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둘 사이에 완전한 독립자, 아비의 종속관계가 없어진 상태로 보게 될 때 피차 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자신에게 이런 손길을 보이실 때는 빨리 끊고 철저히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요것은 괜찮겠지...', '이정도야...' 하는 생각마저 완전히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아비가 죽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아비로부터 독립하는 것이고, 이제는 자신은 주 앞에서 일대일로 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색깔을 변화시키도록 강제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자신 만의 고유한 색깔을 마음껏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슬픈 마음]
세상의 아비들과 이렇게 냉정하게 끊게 될 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슬픔이 밀려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로 끌려감으로 인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원망스럽고, 인정사정없는 냉혹한 것을 원하는 주님이 밉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제대로 된 길을 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3. 맺는 말
 
우리는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로 갈 것으로 알고 떠났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하란에서 허송세월하고 있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신이 예수를 왜 믿게 되었나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가나안으로...
내가 의지하고 있는 아비, 이제는 청산하고 가나안으로 행군을 해야합니다. 지금 이순간 하나님이 나의 독립을 원하고 끊을 것을 끊기를 원하시는 손길을 보시면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비로부터 내가 독립할 때, 나는 내 고유의 아름다운 색깔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찬란한 영광으로 빛날 것입니다. 아멘.
 
 
자유교회
정 덕 영
목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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