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PW AUTO 
 

  새소식 칼럼 말씀 기획연재 대화실 자료실 교회안내 기독서원학개 전도자들
영어사이트
교회학교
 
 
[관리자] 2024.0414 주일말…
[관리자] 2024. 0407 주일…
[관리자] 2024. 0331 주일…
[관리자] 2024. 0324 주일…
[관리자] 2024. 0317 주일…
[관리자] 2024. 0310 주일…
[관리자] 2024. 0303 주일…
[관리자] 2024. 0225 주일…
[관리자] 2024. 0218 주일…
   
 
 
 
 
하나님께서 주신 꿈 (1)
폭포의 꿈 (1)
1월 18일"선한사마리… (1)
방언에 관하여..... (1)
몰렉신 상징성
답변글 몰렉은 내가 만든 예수 (3)
 
        

제목 |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야 (왕상 17:17-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5-05-13 13:51 조회 |4,831회

본문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야 (왕상 17:17-24)

[[왕상17:17-24]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

1. 들어가는 말

[생명의 중요성]

- 육신의 생명의 한계
지난 수요일 저녁시간에는 우리의 생명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아주 소중히 생각합니다.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미국에서 한 식물인간에게 영양공급 장치를 제거해서 안락사를 하게 한 것을 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중하고 또 소중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그것으로 그치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늙어서 수명이 다해도 떠나야 하고, 지진 해일을 만나서, 수영을 잘못해도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하고, 교통사고나 감당하지 못할 질병으로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생명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종국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 영의 생명
우리에게는 이런 육신의 생명말고 또 다른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생명, 또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보이는 세상의 생명이고, 이것을 기반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 이 세상의 생명도 의미 있게 되고, 영생을 얻어서 또한 더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생명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고,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배경]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과부에게 보냄을 받아서, 그 과부에게서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먼저 자신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주면 비가 오는 날까지 먹을 것이 풍족하리라고 합니다. 과연 과부는 그렇게 했더니, 비가 내리는 날까지 병의 기름과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이전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제 그 집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가 그 아이 위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아이를 살려서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어미는 과연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당신의 입에 있는 말이 하나님의 말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2. 본문 해설

2.1 아들을 죽게 한 엘리야 (왕상17:17-18)
[왕상17:17-24]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집주인 과부의 아들이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와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래서 내 아들을 죽게 했습니까? 하고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부의 아들이 죽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상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영적 상징으로 볼 때, 이 과부의 아들은 곧 과부 자신입니다. 이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이고, 왜 죽게 되었느냐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와서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그동안 자신은 죄인인줄 몰랐고 그래서 죽은 자인 줄을 몰랐는데, 참 생명을 가진 예수가 자신 앞에 나타나니까, 자신이 죽은 자인 죄인으로 드러난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당신이 와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내 아들을 죽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앞에서 죽은 자로 드러나는 것이 복됩니다. 그래야 살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말씀 앞에서 악착같이 살아 있기 위해서 각종 이론을 다 내놓습니다.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 나는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 하면서 자기 주장을 펼칩니다. 교회에서는 괜히 재미로 여러분들의 옛사람을 지적하며 여러분들이 반발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저는 압니다. 나중에 분명히 아시겠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어느 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수요성경 공부 때 말씀을 드렸더니, 깜짝 놀라면서 이것 내가 이단 사설에 빠져서 내 영혼이 망가지는 것 아니냐며 극도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인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지금 말씀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또한 정말 하루가 다르게 영혼이 쑥쑥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말씀 앞에 뻣대고 내가 옳다, 죽어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말씀 앞에 죽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이 없으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탕자의 체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말씀이 잘 들리는 것은 자신의 옳다 함을 포기하고 것, 다시 말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이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하는데,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탕자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눅15:17-18]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사르밧 과부가 하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죄가 생각나서 아들이 죽었다는 것과 이 탕자가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이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로 보면 이런 탕자 체험 없이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다가 자신의 옛사람이 조금만 드러나면 말씀으로부터 도망가고, 또는 강하게 대적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자신이 죄로 인하여 죽은 자로 드러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새 생명을 갖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되나 보겠습니다.

2.2 살리심 (왕상 17:19-22)
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여인은 아이를 엘리야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아이를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가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아이 위에 3번 펴서 엎드리고 혼을 몸으로 되돌려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가 살았습니다.

[맡기는 것]
우리는 자신이 죽은 자임을 확실히 인정하게 될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됩니다. 이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자신은 끝이라서 영생을 얻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자신을 엘리야에게 맡기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순종하고 목사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새 생명을 얻기를 소망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혹 아직 맡기지 못하는 분들은 먼저 말씀 드린대로 자신이 살아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말씀에 순종한다고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분들은 목사님을 살살 피합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본]
어떤 분들은 저를 본받고자 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본받으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저를 제1로 본 받고 제 2, 제3의 본받을 다른 목사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것도 받고 저것도 받고 다양한 것 같지만, 아량 있고 풍성한 것 같지만, 저를 본 받는다는 의미를 애초에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죽은 자를 말씀으로 살리는 일을 하고 있고, 여러분이 본을 받을 것은 저의 어떤 외형이 아니라, 바로 죽은 자를 살리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참다운 말씀을 가진 한 분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는 한가지는 거듭남입니다. 그 거듭남은 하나면 족하지 이것 저것 합쳐 놓는다고 더 좋은 거듭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살리는 사람은 하나면 됩니다. 엘리야가 살릴 텐데 엘리야가 온유하지 못하니까 그 보조자로 아합도 데려와 보고 이세벨도 데려와 보는 모습입니다. 제2, 제 3의 여러 다른 본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직 제1의 본이 생명에 관한 본이라는 깨우침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이 세상 외형의 어떤 겸손함이나, 따뜻함과, 인자함을 혼동하여 제2, 제3의 본을 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1의 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인사치레 일 뿐이고, 실은 제2, 제3의 본이, 자신에게 참다운 본이라는 고백입니다. 속으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저 눈물 많은 세상적인 인정과 감싸 안음에 미혹되어서 생명을 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를 엘리야에게 맡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인정으로 한번 살려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 아이를 살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더 긴 세월 방황하고 절망한 후에야 그때 온전히 아이를 엘리야에게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
엘리야가 기도하여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죽은 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되고 아브라함의 품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기도 능력으로 살린 것이 아니라, 엘리야는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요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까? 그것은 말씀으로 그리하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말씀에 신뢰를 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 여러분의 영혼은 새롭게 살아 날 것입니다.

[자유교회에서도...]
저는 자유교회 말씀으로 많은 분들이 살아나는 것을 목도합니다. 그들은 예전에는 삶을 살기는 사는데 어두움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모르고 혼돈 속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점차 점차 새로운 길을 보기 시작하고 그들의 말이 달라지고 그들의 행함이 확실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아해 할 정도입니다. 이곳에서는 오직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고 죽은 뼈가 살아나는 현장입니다.
[겔37:7-10]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이 대언하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현장입니다. 이 현장이 바로 자유교회입니다.

2.3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 (왕상7:223-24)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이제 엘리야가 살린 아이를 어미에게 주니, 그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당신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것인지를 알겠다고 합니다.

[결과가 말해준다]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은 그 결과가 말해 줍니다.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거짓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이 여인이 말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당신이 입으로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증거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당신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하나님이 보낸 자이고, 당신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복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이 참다운 복음이요 사람을 살리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도 가짜가 많아서 그런지 전파할 때 음향 효과도 넣고 찬양도 진하게 하고 영화의 극적인 장면에 이어서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전부 감동을 주고 그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하는 사람도 진정으로 눈물로 전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듣는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눈물 흘리는 거짓말이요, 진심어린 공교로운 미혹인 것입니다.

[교회생활]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다른 교회에서 신앙 생활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말씀을 받고 신앙 생활하실 때에 자신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주어짐을 느꼈습니까?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자라나고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라, 관용하라는 말씀을 계속 들었지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지금까지 지내왔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관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 목표로 가르치고 그런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으면 사랑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고 관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새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서 흘러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앞으로 말씀을 접할 때,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냐? 아니면 나의 행동을 제어하는 말씀이냐를 구분 하십시오.

3. 맺는 말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소중한 것으로 안다면,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의 생명 즉 영생입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살펴 본대로 우리가 따라 나설 수 있다면 자신은 속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어야 말씀 앞에 나오게 됩니다. 겸손히 말씀 앞에 나오면 살아 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말씀이 참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살리는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문서 목록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