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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의한 청지기2 -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눅16:1-9)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5-06-02 22:06 조회 |3,402회

본문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눅 16:]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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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예수에 관한 기본 인식]
우리는 예수에 관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란 우리 눈 앞에 객관적으로 나타나서 모두들 예수로 인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라는 분이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 보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일반 유대인들은 예수를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복음, 또는 구세주로 볼 때, 예수를 알아 본 사람들을 복음을 접하고 구원을 당시 받았을 것이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던 사람들은 그 예수로 인하여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참 예수가 우리 앞에 있다손 치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 예수를 알아 보고 구원의 길을 가고, 또 어는 분들은 그 예수를 핍박하고 비방합니다.

[볼 수 있는 눈]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없을까요? 그것은 지난 금요철야 예배 때 말씀 드린 대로 야곱의 우물가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율법 아래서 온전히 지치고 쓰러진 심령들만이 예수를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 밭이 좋은 땅이 되어서, 말씀에 판단의 토를 달지 않고 순전히 받아 들임으로 인해 그 말씀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이 사마리아여인처럼 남편을 다섯 번 여섯 번 바꾸어도 만족이 없고 공허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면,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율법의 일종으로 이해를 하고 행동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란 이와 같이 아직 사마리아 여인처럼 믿음 생활에서 쓴 맛 단 맛 다 보지 못한 사람이 예수의 복음을 접했을 때 보이는 반응을 계시합니다.

[개요]
오늘 내용은 청지기가 주인이 보던 일을 셈하라고 하니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다고 하면서 주인의 빚 재산을 깍아 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일을 처리하는 청지기를 보고 예수님이 칭찬을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은 이 말씀을 같이 살펴 보도록 합니다.

2. 본문해설

2.1 낱낱이 불러다가,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눅 16:5)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율법도 싫고 복음도 아닌 청지기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어서 하는 일이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빚을 확인합니다.

[빚진 자]
주인에게 빚진 자는 바로 하나님께 빚진 자를 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에게 빚진 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서 죄라는 단어는 빚이라는 단어라고 살펴 본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인에게 빚진 자란 교회 다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매일 빚을 지고 교회에 나옵니다. 혈기 부린 죄, 형제를 판단하는 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죄 등입니다. 이렇게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주인에게 기름 백말 밀 백석을 빚진 자들입니다.

[낱낱이 부른다는 의미]
우리는 가끔 지하철이나 길 거리를 다니다 보면 전도지에 사탕을 달아서 뿌리는 무리들을 봅니다. 그 중에는 우리 남선교회 회원 여러분들도 간혹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의 내용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또는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전도의 말씀을 듣고 그 중에서 천둥과 번개가 칠 때 혹시 그것이 죄 많은 나에게 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은 교회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물론 이런 노방전도 형식으로 교회 나오지 않고, 친구의 권유로 아내의 권유로 나오시는 분들이 더 많지만, 아무튼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청지기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빚진 자들만 교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인에게 빚진 자들만 낱낱이 부른다는 비유의 참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그 모습입니다.

[얼마나 졌느뇨?]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진 빚을 물어 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청지기가 간직하고 있던 치부책을 가지고 와서 '당신 누구인데 얼마 빚이 있어' 합니다. 만일 빚진 자들에게 물어보고 그대로 적용한다면 천 만원 졌는데 오백 만원 졌다고 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 사업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상하게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냐고 그 빚진 자들에게 물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100% 인정하는 청지기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비유가 단순한 세상 비유가 아니라 영적인 세상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백으로...]
빚진 자들에게 빚이 얼마인지 물어 본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청지기인 목회자들은 교회로 사람들을 불러 놓고 교회에서 당신이 무엇을 훔쳤고, 판단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고 하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이 그 사람 마음 속에서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형제를 판단하고 음해하기 때문에 은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은 죄는 그 사람이 스스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남을 비방했고, 판단했고, 혈기를 부렸고... 등등 이렇게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자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백하게 되는 것은 요한일서의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다 자백하게 됩니다.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이 말씀에서 죄를 자백한다는 의미는 청지기가 말한 "땅을 파자니 부끄럽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에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은혜를 빌어 먹는(?)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불의한 청지기는 아직 그런 세상을 알지 못하는 얼치기이기 때문에, 이 자백이라는 말이 자기가 일반적으로 습관적으로 죄짓고 회개하는 그런 반복적인 회개로 스스륵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회개하라는 말로 받아 들이고 그렇게 죄를 반복적으로 자백을 합니다. 이 장면이 바로 이 청지기자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느냐고 묻는 장면이고,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2.2 죄사함 (눅 16:6-7)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빚 삭감의 문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빚 재산을 주인의 허락 없이 일부를 삭감해 줍니다. 이것이 또한 이 청지기의 복음이 얼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의 죄사함은 단번의 영원한 죄 사함이기 때문입니다.

- 영 단번의 죄사함
예수님의 죄사함은 일부 죄사함이 아니라, 영원히 단번의 죄사함입니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불완전한 삭감]
청지기는 이들을 불러다가 빚을 삭감해 줍니다. 그런데 이 빚은 기름 백 말을 오십으로, 밀 백석을 팔십으로 삭감해 주는데 완전히 탕감해 주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모습이고, 지금 다른 교회에서 가르치고 또 우리가 그 가르침 속에 즐거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선포 받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온전한 죄사함이 아니고, 부분적 죄사함입니다. 평생 성화되어야 하고, 죄 없는 삶은 오직 육신의 몸이 죽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교리에 입각하여 평생에 죄 짐을 지고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이 기존 교리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청지기가 50퍼선트, 20퍼센트 삭감을 해 주었지만, 여전히 주인에 대한 빚이 기름 50말이 남고, 밀 80석이 남은 것이 우리의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 불완전한 삭감이 좋은 우리
이런 불완전한 죄사함이 예수의 죄사함으로 먹히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는데도 계속해서 자신에게서 죄된 행동이 흘러 나오는 것을 정당화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입장에도 불완전한 삭감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죄를 삭감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온전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고 싫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깨끗한 옷을 입으면 더러운 것이 묻을 까봐 온 정성을 다하고 더러운 것을 피해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새 옷을 입게 되면 새것이라서 때가 묻지 않도록 더 더욱 조심을 하게 됩니다. 깨끗한 것도 좋지만 그런 생활이 무척 힘이 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중간하게 지저분한 옷을 입으면 좋습니다. 자장면을 먹다가 튀어도 물수건으로 슥슥 문지르고 나면 되기 때문에 이런 옷이 입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은 '사도바울도 자신이 평생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어...' '평생 성화되어 가는 것이야' 라며 정당화 시킵니다. 자신이 적당히 죄인 됨이 좋고 편합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죄사함은 곧 땅을 파자니 힘없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예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처사]
청지기는 죄사함을 선포하는데, 그것을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결국 예수의 죄사함을 전파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예수의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하지만, 예수의 피를 모독하는 처사입니다.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온전한 죄사함을 주는 예수의 피를 어설픈 것으로 전하고 있으니, 예수의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2.3 친구를 사귐 (눅16:4)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비유에서...]
청지기가 주인의 빚을 삭감을 해 주는 목적은 친구를 사귀기 위함입니다. 비유에서는 자신이 빚 삭감을 해 주고 난 다음 다음에 그 집에 가면 영접해 주리라는 아주 타당한 계산 때문입니다. 성경의 비유는 우리의 본성과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 속의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이런 구도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비유의 실체로 돌아온다면, 우리 에수 믿는 자들이 예수의 복음을 접하면 우선 죄사함을 선포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존교리로 죄사함을 선포하는 곳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죄사함을 선포하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픈 죄사함을 선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로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온전한 죄사함의 길을 선포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주지 못할 때, 결국 교인들은 교회 내에서 세상 일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친구들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질을 거두고, 교회 봉사를 하게 하고, 구제를 하고, 교회 부흥을 부르짖어도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세상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온전한 죄사함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에서 성도가 10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온전한 죄사함의 말씀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올려 보내지 못한다면 할 때는, 불의한 청지기처럼 어설픈 죄사함을 주고 10만 명의 세상친구를 얻는 셈입니다.

[온전한 죄사함]
이 세상 사람들을 불러서 완전한 죄사함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준다면 그것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참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어떤 보상을 바라고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은 거래 행동이 아니고,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죄사함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주는 곳에서는 사회 구제를 하든지, 교회 부흥을 위해서 전도를 나가든지 이 모든 일들이 하늘 나라의 친구들을 얻기 위한 의로운 행함이고 사랑의 행함들입니다.

3. 맺는 말
근본적으로 불의한 청지기는 예수를 믿되 잘못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 불의한 청지기는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20-30년 동안 우리가 예수 잘못 믿어 왔다는 증거가 이 말씀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은 믿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누가복음 16장 말미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에서 물 한방을 얻기 위해 혀를 내밀고 고통 당하는 부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곤고하고 만족이 없고 공허한 것을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지...' 생각할 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행함은 오직 음부에서 물 한 방울로 자신의 목을 축이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은 아랫목에서 윗목을 옮겨 다니는 그런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얼치기 복음에 있는 자신의 신앙 생활을 청산하고 참된 복음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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