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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1-요일1:1-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1-24 15:24 조회 |3,883회

본문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요일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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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성경 중 요한복음,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는 당시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록한 서신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영지(靈智)란 헬라어 '그노시스'을 번역한 말이며 영지주의자들을 그노시스파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간단하게 말하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요한일서의 내용을 추측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는 2000년 전의 영지주의자들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과연 요한이 그들의 주장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 요한일서를 기록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그것을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하면 됩니다. 우리는 오직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알고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요한은 태초의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보았고, 주목하고 만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보고 만진 바 된 말씀을 전하는데, 듣는 자들도 자신들과 하나님과 예수와 함께 있어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쓰는 것은 자신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요한은 이 서신 서두에서 이미 요한일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들에게 임하였고, 그 생명을 이제 형제들에게 전하는 기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한일서의 내용이기도 하고 또한 성경 전체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만진 바 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요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 그리고 생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주목할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늘에 계신 말씀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성육신(成肉身)입니다. 이 성육신 하신 예수를 통하여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 그리고 당 시대를 살던 유대인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형체가 없는 그 생명의 말씀이 우리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이 물질 세상에 온 것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도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예수를 보았고 만졌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질 때 예수의 손을 잡았고, 도마는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자국도 만지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삼 년 반이란 세월 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생명이시고 말씀이신 예수를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진 바 되었다고 말하는데 손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한은 자신들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를 그런 방식으로 보고 만지고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즉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를 직접 목도하고 손으로 만졌던 그 증인으로서 예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요한이 예수를 전한다면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요한이 알게 되고 전하게 되는 예수는 외형과 육신의 예수요, 껍데기 예수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는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함께 동거하여 살고 손으로 만짐으로 알아지고 또 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낳고 낳는 관계에서만 전해 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 생명 번성의 좋은 예인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생명을 받으려면, 남자를 만져보고 목소리를 듣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육신의 모양 뿐이고,남자와 그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진정 그 남자를 알려면 그와 하나되어서 그의 씨를 받고,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자신이 그 남자를 알게 됩니다. 이때 여자는 비로소 남자의 생명을 자신의 몸 안에 들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말대로 남자의 생명을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이렇게 잉태되고 낳고 낳음으로 알려지고 또한 전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보고 만진 바 되었다는 것은 그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여 자신이 예수의 생명을 낳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공부나 좋은 교육프로그램에 세미나를 통하여, 또는 신학공부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전달되지가 않습니다. 전하는 자의 말씀이 듣는 자의 마음에 잉태되고 그 생명이 최종적으로 듣는 자에게서 해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듣는 자는 전하는 자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아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구조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듣는 자는 생명의 말씀을 보고 만진 바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듣는 자와 하나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한이 생명의 말씀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고기 잡다가 예수를 처음 만나서 따라 나섰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육신적으로 보고 만났지만, 진정으로 말씀의 생명을 본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 성령을 받았을 때입니다. 이때 요한은 생명의 말씀과 하나되었고 그것을 보고 만진 바 된 것입니다 .
  이때 그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신 생명의 말씀을 본 것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벧후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이 영원한 생명 !

[요일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생명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생명을 육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되지도 않는 것 이루려다가 좌절하고, 성질 내고, 그러다가 죽고 마는 그런 생명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삶을 치장을 하려고 해도 결국 회한에 찬 인생으로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안 죽어 봐서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은, 병원 중환자실에 가서 죽기 직전의 사람들 인터뷰해서 들어 보십시오. 절대로 육의 인생에 만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그러니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육으로 난 생명과 그 삶입니다.
  이제 이런 육의 생명에 대비되는 영의 생명이 있습니다.
[요 3:6-7]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온 육의 생명이 예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으로 다시 한번 나는 것이고, 이런 생명을 가지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예수의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은 시기와 질투와 반목이 없고 오직 사랑과 평강으로 사는 삶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명으로 사는 삶과 고귀한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삶, 어느 삶을 원하십니까?
  요한은 그 예수의 생명을 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귀하고 귀하다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생명으로 인한 삶은 노력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는 것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육의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영의 삶을 살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육의 생명이면 육의 삶을, 영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에 따른 삶은 노력 없이 펼쳐지게 됩니다.

  예컨대 고양이는 쥐를 잘 잡습니다. 그것은 고양이 생명의 한 특징입니다. 고양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모두 쥐를 잘 잡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았다고 자랑하는 것도 없고, 노력이라고 할 것도 없고, 또한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쥐를 잡는 것은 고양이의 삶입니다.
   
  영으로 거듭나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삶에서 예수의 생명의 특징을 보이는데 그것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그냥 삶입니다. 이들의 삶에서 보이는 사랑과 선행이 바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공중의 새와 같은 삶이고 들의 백합화 같은 삶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생명을 받느냐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 전하노니...

  요한은 이렇게 자신에게 나타나게 된 예수의 생명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누가 전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생명체로서 그 생명을 자연스럽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해서 전도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어떤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를 지식의 전달로 생각하고 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은 예수의 지식을 전하지만 아비는 예수의 생명을 전합니다. 생명을 전하는 아비가 되려면 먼저 요한과 같이 자신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 바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전한다는 말의 뜻은 말씀에 의해서 듣는 자들에게 잉태와 해산의 과정이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비의 생명이 듣는 자들에게 전파되게 되고 그들은 결국 한 생명, 예수의 생명 안에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무엇이 스승이 전하는 예수이고 무엇이 아비가 전하는 예수일까요?
 
아비의 예수는 우선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의 낳고 낳음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듣는 자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의 생명이 지금 있는 곳

  요한은 예수의 생명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자신들에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합니다.

[요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후 3년 반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의 몸 안에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물론 세상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고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제자들에게 나타냈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들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과 제자들을 함께 계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 40일을 이 세상에 게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계시던 예수님은 30세까지와 그 후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이후 이 세상에서는 육신을 입고는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위치를 누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야 정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이 정도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들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일치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전에는 하나님 곁에 계셨지만, 이 세상에서는 생명을 받은 자들 안에 나타내신 바 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수의 생명을 가진 제자들 몸 안에서 계십니다.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이 세상에 있던 예수님은 그 이후 예수의 생명을 전해 받은 제자들의 몸을 매개체로 이 세상에 여전히 계십니다.

  예수와 예수의 생명을 가진 제자들은, 같은 생명을 가진 같은 본질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생각한다면 제자들은 그로 인한 많은 밀알들입니다. 첫 번째 밀알과 그로 인한 많은 밀알은 그 본질 면에 있어서 모두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만나 그로 인하여 생명을 받기를 원한다면 2000년 전의 예수님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만남을 고집한다면 절대로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따라서 그로 인한 구원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을 가진 제자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예수의 생명을 낳아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그 영원한 예수의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요한처럼 보고 만지고 주목하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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