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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6-요일2: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2-25 00:11 조회 |3,686회

본문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일 2:1-6]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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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속담에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을 때면 굴뚝에서 당연히 연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기를 보면 실제적으로 불 때는 것을 보지 못했어도 아궁이에 불을 땠다는 것을 압니다. 불 때는 것과 연기가 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보면 불을 땠고, 불을 때면 연기가 납니다.

  따라서 불을 때면 연기가 난다는 말은 조건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보는 일반 조건이 아니라 둘이 하나인 진리의 조건입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인 진리적 조건에는 그 둘 사이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불을 때면 연기가 납니다. 불을 땠으면 연기를 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또한 인간이 마음대로 연기를 냈다 안 냈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불을 때면 연기가 납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죄를 짓는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둘은 하나인 진리의 조건 관계입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또한 인간이 마음대로 죄를 지었다가 안 지었다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죄사함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죄사함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불을 땠기 때문에 연기가 나는 것이지, 불을 때지 않으면 연기가 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영적으로 본다면 불을 땠는데도 연기가 안 난다던가 아니면 불을 때지 않았는데도 가끔 연기가 난다는 해괴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거짓된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고, 이들이 예수를 만나서 죄사함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2장에서도 온전한 죄 사함의 문제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일2:3-4]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우선 여기서 '그의 계명' 이라고 할 때 '그'는 누구일까요?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이 두 분은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분으로 보아도 의미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으로 보겠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명을 준수하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자고 진리가 없는 자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하여 그런 사람임을 보이자" 라는 의미로 읽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한도 끝도 없고 또 우리가 계명을 다 지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 계명을 지키는 자

  그렇다면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자에 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계명을 지키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직 진리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라."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은 둘이 하나인 진리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아는 줄 안다"는 말은 "연기를 보면 불 땐 줄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을 알면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뜻이고 속담의 예로서는 "불을 때면 연기가 난다" 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 믿는 자들로서 계명을 지키려고 긴 세월 노력을 했고 그래도 안 되어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아주 중차대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계명을 지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는 진리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계명에 바로 접근하는 불가능한 시도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계명을 지킨다면 우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을 받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러면 또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 17:2-3]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길은 그들의 죄를 사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계명을 지킵니다. 요한은 이 말을 뒤집어서 "너희가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계명이란 곧 말씀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했다가 또 5절에서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라고 동일한 뜻으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또는 계명을 지킨다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아는 것이 곧 계명을 지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로 인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계명은 준수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에 의해 죄사함을 받은 존재가 되면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계명은 준수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을 앎으로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

  4절에서 요한은 3절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 반하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 관해서 말합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계명을 지킵니다. 불을 때면 연기가 나는 하나인 관계입니다.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거론하는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율법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데도, 가끔 죄를 지어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그는 아궁이에 불을 땠는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았는데도 연기가 가끔 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지 못했고 진리의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거짓을 자기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고 진리가 그 안에 없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

[요일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고, 그가 하나님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결과적으로 말씀을 열심히 지키라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적인 의미보다는 다음과 같은 복음적 의미가 더 합당한 이해입니다.
  즉, 예수에 의해 십자가 사건을 겪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그 안에 임했으며, 하나님을 안에 있고, 이런 사람은 말씀을 지킵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표현은 이전 절의 하나님을 안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요 17:25-26]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대상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존재의 사랑을 말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이 사랑이 이루어진 것은 서로 하나인 관계입니다.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 주겠다는 일상의 조건적 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예수에 이끌린 삶을 사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예수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후자는 이룰 수 없는 율법적 노력에 불과합니다. 예수에 이끌린 삶이란 예수를 만나서 삶 속에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나 아닌 다른 인격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한 간증을 예로 들어 말씀 드립니다.
 
  어느 분에게 매일 주님과의 교통함을 가지고 사소한 일에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분은 그래서 매사를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앞에 사람이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려야 하는데 이 사람은 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야' 하면서 밀치듯 뚫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몹시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서 속으로 "말로 하지 왜 밀어?' 하는 표정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것을 통해서 "아, 앞으로는 내 주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먼저 말을 하고 지나가야 하겠구나" 하면서 자신이 고칠 부분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있었나 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지만 주님과 동행하라는 권면을 받은 이후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 분은 저에게 와서 그 상담을 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분석하고 고치려는 노력이지, 그것은 주님과의 동행이나 교통함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동행함은 주님을 집사님의 마음 속에 인식하고 초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에게 비켜 달라고 말을 하고 지나갈까요, 아니면 그냥 밀치고 갈까요?"
  이런 기도는 자신과 주님이 그 상황을 동시에 보고 있다는 인식에서 바로 곁에 계신 주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어떤 형태로든 마음에 응답을 주십니다. 말하고 가라는 응답을 주셨음에도 급한 마음에 그냥 밀치고 갔다가 상대방이 인상 쓰는 모습을 보면, 주님이 자신에게 인상 쓰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응답을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혼자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는 또 다른 인격인 주님과 동행하고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일주일 동안 그렇게 분석하면서 "이것이 주님과의 동행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찜찜한 생각이 있었지만 무시했다고 합니다. 제 말을 듣고는 '그것이 주님과의 동행함이 아니었군요' 하십니다. 사실 주님은 그 분에게 찜찜한 마음을 주어서 교통하려 했지만 이 분은 그 주님을 몰라서 무시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말씀을 지키는 자' =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된 자' = '하나님 안에 있는 자' 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동행으로 죄사함을 받으면, 한꺼번에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고 사랑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과 같이 행할지라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자신도 행할지라.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았는데도 가끔 죄를 짓는다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고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 또는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항상 거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들락날락하는 것을 거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죄를 짓는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그럴 바에야 예수 왜 믿습니까? 죄사함의 예수를 죄사함의 예수로 받지 못하는 억지를 부리면서...
  아궁이에 불을 땠으면 연기는 자연히 나오는 것입니다. 불을 때지 않은 채로 연기를 내려니까 연기(煙氣)가 아니고 연기(演技)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은 왜 이렇게 자신에게 무감각할까요? 진정 자신의 모습을 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참예수를 만나서 온전한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자신도 행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 이끌린 삶을 살면 그 결과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계명의 실체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하셨으니 우리는 이제 계명을 항시 지킬 수 있습니다. 계명이 예수에 의해서 우리 마음 판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을 모순입니다. 그런 모순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예수를 만나서 죄사함 받고 진리의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런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임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자연히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 한 분이 이 모든 것들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읍시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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