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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흉악한 자를 이긴 청년(10-요일(2:1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3-20 16:16 조회 |4,099회

본문

흉악한 자를 이긴 청년

[요일 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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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봅니다. 모 유명 야구선수가 돈 때문에 일가족 4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유괴되어 변사체로 발견되고, 옆집 여자 아이를 성폭행 하려다가 죽이는 사건을 봅니다.
  누가 이런 흉악한 짓들을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람 안에는 흉악한 자가 들어 앉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적 이익이 침해 당하거나 또는 그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마저 무참히 짓밟고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이런 흉악한 자를 이기고 극복해 내지 않으면 우리도 저희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흉악한 자를 이기는 일은 혼자의 노력과 정신 수양이나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분의 인도함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서의 흉악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함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은 영적 차원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함입니다만, 아무튼 이런 일들은 거듭나기 이전의 육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요한은 믿음의 성장도에 따라서 아비, 청년, 아이의 세 단계로 구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선 아비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성령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청년은 악한 자를 이긴 자입니다. 그는 예수에 이끌린 삶을 거쳐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입니다. 아이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율법 아래서의 긴 세월을 청산하고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앞에 나와 그 길을 가고자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요한은 각 단계별로 다시 한번 아비-청년-아이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을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믿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자라나는지에 관해서 더 확실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여기서는 청년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을 중점적으로 살펴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아비

[요일 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요한은 아비를 재차 언급하면서 먼저 내용을 그대로 다시 한번 말합니다. 우리는 그때 아비를 이렇게 보았습니다.

  아비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자입니다. 아비는 긴 세월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말씀이신 예수를 만났을 때 아이였었고, 예수와 연합하여 자신 안의 악한 자를 이겨내 청년에 이르고 장성한 자로 자라나서 성령세례를 받고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 된 자입니다. 이런 아비가 바로 태초부터 계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인 것입니다.

  그럼 요한은 왜 아비를 다시 설명하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 했을까요? 청년이나 아이를 다시 말할 때는 많은 말들을 추가로 하고 있는데...
  아비는 아이와 청년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아비는 다시 부연 설명을 한다고 해도 아이와 청년을 자세히 말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이나 청년에게 주는 말을 종합하면 그것은 곧 아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종로에 계신 분들이 자유교회에 등록을 하려 한다면
  첫째, 일산에 있는 자유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꼭 새 생명을 얻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이 단계입니다. 둘째, 실제로 몸을 움직여 지하철을 타고 일산 대화역, 2번 출구에서 내려 나오는 것입니다. 귀찮고 힘이 들 때입니다. 이것이 청년단계입니다.
  셋째, 자유교회에 도착하여 등록합니다. 이것이 아비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종로에 사는 사람들이 자유교회에 등록하려면, 우선 자유교회에 올 마음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지하철을 타고 대화역 2번 출구에 내려서 나와 자유교회에 오면 된다 라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에 대한 것보다 오는 과정을 말함으로 교회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은 아비를 다시 설명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결국 청년과 아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청년에 관해서 말합니다.

강하고 말씀을 가진 청년

[요일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전에 청년의 정의를 악한 자를 이긴 자로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조금 더 추가해서 설명합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한은 청년은 강하고,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 강하다

  여기서 청년이 강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청년들이 강하다고 하니까, 힘이 펄펄 넘쳐 교회에서 무거운 물건을 잘 운반해 주고, 교회를 허물려는 세력들이 밀려오면 그들을 물리치는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강한 힘으로 흉악한 자들을 이겼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육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요한이 강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아이가 청년이 되는 것은 예수에 의해서 이끌림 받는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청년이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그리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자가 십자가에 죽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 큰 반발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청년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강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강한 것이 아닙니다. 청년이 강하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악한 자가 십자가에 죽는 과정을 잘 견디어 낸 면에서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강한 자가 아니면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를 떠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좁은 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자주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과정을 암 환자가 수술 후에 건강하게 되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예수에 이끌린 삶이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암세포를 예수님이 수술로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암 환자는 아프고 외롭고 슬픈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수술 도중에 아프다고 울고 불고하고, 의사한테 무례하게 대하고, 도망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약한 자입니다. 이 수술을 잘 견디어 내는 자가 진정 강한 것입니다. 이들은 그래서 청년이 되고, 청년은 그래서 강합니다.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에 이끌린 삶의 기간 동안 그들의 모습을 어땠을까요? 귀신 한 마리도 못 쫓아내고 낑낑댔고, 밥만 먹으면 거의 매일 예수님으로부터 책망만을 받았던 이들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강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강했습니다. 갸룟 유다만 빼고... 어떤 의미에서 강한가 하면 그들이 예수님이 이끌어 내시고 드러내시는 자신들 안에 있는 흉악한 자를 처리할 때, 잘 참아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강함입니다.

[눅 22:28-30]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시험 했을 때 그들은 잘 견디었고, 끝까지 예수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견디는 면에서 그들은 강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에 이끌린 삶의 과정을 거칠 때 오직 견디어 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청년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청년 안에 거하심

  청년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어떤 한 두 가지 명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년에게는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거한다고 합니다.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 모세에게 주었고, 이 말씀은 돌판 위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준수해야 할 율법으로 받아 들이고 그것을 지키려고 했습니다만,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돌판 위에 기록된 말씀을 주신 의도는 그 말씀이 우리 마음판에 새겨져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행동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너희가 준행하고 또한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렇게 땅(사람의 마음판의 비유))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바울은 자신의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합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청년의 과정을 겪었고 그로 인하여 변화를 받아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계명과 같이 우리가 준행할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판에 말씀이 새겨지는 것은 예수에 이끌림을 받는 삶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을 잘 견디어 내는 사람들이 청년들이고,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십니다.
     흉악한 자를 이긴 청년

[요일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먼저 청년을 말할 때 요한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고만 했습니다. 여기서는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고,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모두(冒頭)에서 말씀 드렸지만 진정 흉악한 자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 흉악한 자를 예수와 함께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흉악한 자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고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흉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이신 예수 앞에 나오게 되면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흉악한 자를 드러내십니다. 형제들과의 부딪힘을 통해서, 가족을 통해서, 지나가는 행인을 통해서, 모든 환경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악한 자에게 종 노릇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보고 회개하고, 그 악한 자를 자신 밖으로 내 보내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악한 자가 '나'로부터 분리가 일어나게 되고 '나'는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옳다함 때문에 모든 부딪힘의 원인을 외부 형제나 환경 탓으로 돌리며 혈기를 부리기 십상입니다. 분명히 자신의 악한 모습과 눈 먼 모습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참고 참았는데 형제가 더 약을 올려서 그랬다."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이런 악한 자에게 지배를 받게 되면 목사님의 지적에도 항변합니다.
  "목사님은 특정한 사람들 편만 들어 주고 나만 책망하신다."
  그리고 목사님이고 뭐고 다 싫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부드럽게 드러났을 경우입니다. 강하게 부딪히거나 악한 자가 지속적으로 드러나 책망을 받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이때 자신의 악한 자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오히려 분노를 표출하게 되면 자신 안의 악한 자에게 동조하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의 화살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형제한테로, 목사님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쓰신 형제나 목사님을 밟고 올라 타니까, 그것이 곧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자의 종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수에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악한 자에게는 모두 자기 옳다함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악한 자의 옳다함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 악한 자가 예수를 죽이게 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악한 자를 이기지 못하고 그의 종 노릇을 평생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자기 옳다함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주님의 옳다함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안에 있는 흉악한 자를 두둔하게 되고 그를 이기기는커녕 그의 종노릇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으러 나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예수에 이끌린 삶에서 드러나는 흉악한 자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떠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참고 견디어 이 흉악한 자를 잘 이겨내야 청년이 됩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긴 세월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이 3년 반 동안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이고 악한 자를 이기는 길입니다. 이긴다는 말을 극복한다는 말입니다. 잘 참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흉악자를 이기고 청년이 됩니다.
 
맺는 말

  아비는 아이가 청년의 과정을 거쳐 장성하게 된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시절과 특히 청년시절을 잘 견디어야 남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줄 수 있는 아비가 될 수 있습니다.
  청년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 이끌린 삶의 과정을 잘 견딤으로 강함을 보여야 합니다. 또한 그 청년의 과정은 말씀이신 예수와 '나'가 하나되는 길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기간 중에 자신 안에 있는 흉악한 자를 온전히 쫓아내야 합니다. 흉악한 자가 드러날 때는 단호히 자신과 분리시키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때 환경을 탓하고, 형제 탓하고 하며 흉악한 자를 위하여 변명한다면 그의 종 노릇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

  지금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앞에 있습니다. 아이들인 것입니다. 이제 이 아이는 청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악한 자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때 잘 견디어야 하고, 악한 자에게 힘을 실어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이 마음에 기록되게 되고, 흉악한 자를 이긴 청년이 됩니다.
  이런 청년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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