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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상을 사랑치 말라 (11-요일2:15-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4-05 15:01 조회 |4,640회

본문

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예수를 믿는 것은 영적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모세를 따라서 애굽을 나왔듯이, 예수 믿는 자들도 예수를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 SBS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 한 사이비 정신 수련단체를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어 이 세상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스승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될 것 같았지만 되는 것은 없었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속았다는 생각에 방송국에 제보를 한 모양입니다. 방송 프로그램은 그 스승을 거짓 스승으로 조명을 했고 그 단체는 결국 해체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방송은 그 단체에 빠졌던 한 사람을 비추었는데 그는 지방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다가 이 단체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련에 몰두하다 보니까 당연히 모든 농사 일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이 터지고 그 단체와 스승이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 그는 다시 일상의 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는 SBS카메라 앞에서 "나 같은 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열심히 버려 두었던 녹차 밭의 잡초를 베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이 공허한 세상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세상 경찰'에게 붙잡혀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 온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 말은 녹차 밭을 내팽개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나올 수 있으려면 인간 스승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옳은 말을 해도 그것은 애초부터 다 사기요,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을 하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만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능합니다. 
 
  지난 번에 이어서 요한일서의 청년에 관해서 계속 살펴 봅니다. 청년들은 예수에 인도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과정을 잘 견딘 면에서 강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졌고, 그렇게 자신들 안에 있는 자기 옳다함을 주장하는 흉악한 자를 이기었습니다. 지금 살펴 볼 말씀 요일2:15-17절도 청년들에 관한 내용의 연속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이 예수에 이끌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예수에 의해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이때 필연적으로 우리는 세상 것을 끊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실질적으로 된 사람이 아이이고, 이제 그 과정을 실제로 겪고 잘 견디어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한 사람이 청년이고, 그 청년이 장성하게 자라면 아비가 됩니다. 이렇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함으로 청년이 되는 것을 볼 때,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청년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세상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타락한 인간의 눈에 보이는 바, 세상과 세상 것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이루고 건설한다 해도 그것은 세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재물을 모아서 남들을 돕겠다거나, 무소유를 실천하고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것이나, 부모를 공경하고 노인을 우대하겠다는 것이나,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하겠다는 것... 등등, 아무리 훌륭하고 숭고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세상과 세상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에서 예외인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애초에 세상과 세상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이런 세상 사랑을 그치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나름대로는 기독교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마저도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도도하고, 절제도 하고, 자신에게 스스로 고난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행동들이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 즉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적인 노력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골 2:20-23]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육체를 좇는다는 것은 곧 세상과 세상 것을 사랑한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그치려면 스스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형식의 세상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고 따르겠다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다음 말씀에 의해서도 확인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어떤 사람이 세상과 세상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자신을 말합니다(요일 4:16).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려면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에 의해서 우리 안의 악한 자가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를 믿고 화스과정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랑의 실체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세상과 세상 것들은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 생의 자랑입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체를 가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욕망입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등등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나타나는 모든 욕구가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런 것들을 충족시키려고 모든 정성과 수고를 다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욕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그것을 추구한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인도함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할 사람들이 그런 세상 것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면 세상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주일날도 택시 운전을 해야 한다 또는 직장에 나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또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일에는 등산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이 우선이기 때문에 간혹 시간이 남으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을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비록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주님을 따라 나서야 이 세상에서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 사랑의 세 가지의 세상 사랑은 이 세상에 살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것들입니다. 세상 사랑은 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바로 이 세 가지 문제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귀가 예수를 시험한 첫 번째 것은 바로 육신의 정욕인 먹는 문제였습니다.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나와서 돌덩이가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로 예수님도 40일 금식하면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은 먹고 싶은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3일만 금식을 해도 몸이 힘들고 온갖 부정적이고 원망적인 생각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아직 먹지 말라고 한다면 순순히 순종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뜻보다 육신의 정욕이 우선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일생을 사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이 세상을 빠져 나갈 수 있으려면 육신의 소욕보다 예수를 더 사랑해야만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출애굽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인도하심을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두고 쫓아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요한이 여기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결국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 안목의 정욕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마음입니다. 남들로부터 인정 받고 영광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하고, 좋은 학력에, 좋은 집, 좋은 자동차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교회에서는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신령한 은사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지만, 주님과 하나됨 없이 이런 일에 몰입하게 되면 오히려 그 일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보다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에 이끌리 세상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은 곧 안목의 정욕 때문입니다. 세상의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노라면 주님의 부르심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두 번째 안목의 정욕에 관한 시험을 받습니다. 
 
[마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다면 인기 만점의 예수가 됩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십자가에서 뛰어내려서 아래 있던 자들을 전부 처치해 버린다면 정말 멋있는 예수님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이런 욕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내가 우리 교회에서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있어, 네가 나를 감히 그렇게 취급해..." 하는 마음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런 안목의 정욕대로 따라가다가는 주님을 놓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이런 것들에 정신을 빼앗기니까, 그것을 주님 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까지 이런 안목의 정욕을 물리쳤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를 세상에 붙들어 놓는 요소는 이 생의 자랑입니다. 
  이 생의 자랑이란 인생에 있어서의 영광과 자랑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멋지게 장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자체로는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지라도 자신의 마음 속은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자신의 인생에 후회가 없고 만족한다며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답을 합니다. 하지만, 모르고 그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답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한 인생은 절대로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열심히 세상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 생의 자랑을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신기루를 찾아 살다가 결국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 번째 시험이 이것입니다. 
 
[마4:8-9]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예수님께 이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경배하는 것을 대답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세상의 임금으로 등극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등을 생각해 보면 그러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초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세상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을 다 하나님 앞에서 버릴 수 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와 같은 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예수가 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에 이끌린 삶의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따라 나서면 세상으로부터 좇아 온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그 안에서 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욕들과 이 생의 자랑들도 다 지나갑니다. 이런 세상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거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환경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고 그 집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를 받게 하십니다. 그 거푸집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미려 하지 말고, 오직 그 거푸집인 환경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란, 주님에 이끌려 세상을 빠져 나오는 사람과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이 세상에 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죽으면 명실공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실 솔직한 심정은 그래도 예수를 믿으면, 먹을 것, 입을 것이 풍부하고, 능력도 많고 남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또한 세상의 영광도 누리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놓을 때 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것들도 맡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다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먹을 것을 구해 가지고 왔고, 마태복음 16장에서 건너편(?)으로 갈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먹을 것을 준비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에게 귀하게 보였고 많은 찬사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안목의 정욕도 충분히 충족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고자 열심히 따라 다녔던 것을 보더라도 세상의 모든 영광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듭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이런 세상 영광은 필요상 주어지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붙잡고 놓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과 함께 사망 중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 것을 우리에게 안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면 놓지 않기 때문에 지금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놓을 때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직 그들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 이끌린 삶으로 인하여 가능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이끌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것을 뒤로하고 예수를 따라 나서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놓지 못하는 세상 것들은 다 지나 갈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 살 동안 한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과 하나 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입니다. 이전 절의 표현대로 한다면 강한 자이고, 말씀을 가진 자이고, 흉악한 자를 이긴 청년입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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