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PW AUTO 
 

  새소식 칼럼 말씀 기획연재 대화실 자료실 교회안내 기독서원학개 전도자들
영어사이트
교회학교
 
 
[관리자] 2024. 0421 주일…
[관리자] 2024. 0414 주일…
[관리자] 2024. 0407 주일…
[관리자] 2024. 0331 주일…
[관리자] 2024. 0324 주일…
[관리자] 2024. 0317 주일…
[관리자] 2024. 0310 주일…
[관리자] 2024. 0303 주일…
[관리자] 2024. 0225 주일…
   
 
 
 
 
하나님께서 주신 꿈 (1)
폭포의 꿈 (1)
1월 18일"선한사마리… (1)
방언에 관하여..... (1)
몰렉신 상징성
답변글 몰렉은 내가 만든 예수 (3)
 
        

제목 |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18-요일 3:7-10)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6-20 12:04 조회 |5,005회

본문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요일 3:7-10]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태어난 육에 속한 사람과 그런 삶에서 지쳐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 의해서 거듭나게 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해서 생각해 본다면 육에 속한 사람 다음에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을 육이라고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을 영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여기서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우리가 듣기에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구분합니다. 요한은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로 구분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마귀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는 사실상 타락한 인간을 칭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무릎치며 읽는 성경3에서 다룰 예정이지만, 어쨌든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는 하나님을 떠난 육에 속한 인간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한 일들을 보면 과연 하나님께 통제 받지 않는 인간의 심성이 얼마나 마귀적이라는 것을 절감하실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즉 육에 속한 인간이 곧 마귀요 또는 그의 자녀입니다. 이런 마귀의 자녀들이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은 교인들에게 미혹 당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에 속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으로 마귀의 일이 멸해지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구분되며, 의를 행하지 않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포도나무는 포도를 가시나무는 가시를 맺는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의인은 의를 행하고 죄인은 죄를 행한다는 이것입니다. 의인도 가끔 죄를 짓는다거나, 아니면 죄인도 가끔 의를 행한다는 우리의 기존 인식을 고치지 않으면 읽기가 매우 난해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요한은 누가 하나님의 자녀고 누가 마귀의 자녀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미혹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요일 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한은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혹은 애니콜(Anycall) 핸드폰을 사는데 미혹되어서 중국제 에미콜 (Amycall)을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석가들은 이 의미를 영지주의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한 말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이 이 당시 무엇을 가르쳤는지 또는 요한은 과연 그 당시 그 상황을 두고 말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연구하려는 시각은 역사적, 고고학의 분야이지 진리의 성경말씀을 보는 올바른 눈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영적으로 깨우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혹이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아니면 유사한 것에 속아서 그 생명을 빼앗기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미혹은 무엇일까요?
  그 미혹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죄사함을 주셔서 다시는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해야 한다는 사이비 죄사함의 교훈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죽을 때까지도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죽게 되는데 믿는 자들에게 이것보다 치명적인 미혹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에서 어느 사안에 대하여 미혹에 조심하라고 하면, "미혹 당하지 않게 조심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준비하면 이미 틀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미혹 당하지 말라, 또는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것에 의해서 미혹 당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곳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 말씀이 다음 말씀과 연계되는 것을 보겠습니다.
    요한은 "미혹되지 말라" 해 놓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 같이 의롭다"고 합니다. 의를 행하는 자란 누구입니까? 여기 의를 행하는 자란 자신 안에 주님이 나타나신 바 되어서 주님과 하나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의를 행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의로움은 곧 주님의 의로움과 같습니다. 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이 그들 안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의로움 같이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포도열매에 해당되고, 그 사람 자신은 포도나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포도나무가 되는 것은 자신 안에 의의 근원인 주님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진정 포도나무로서 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마7:16-17]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미혹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자신이 가시나무인 채로 열심히 노력하면 포도열매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가시나무라는 깨우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의를 행하다가 힘들면 못해서 회개하고, 또 다시 힘들여 의로운 행위를 하고 못해서 회개하고..." 합니다. 당연히 평생에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미혹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그런 모습을 지적하며 그것은 주님의 의로우심 같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의로우심은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내는 것 같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죄사함 받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같은 완벽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죄사함 받았지만 그래도 반복적으로 죄 짓고 회개해야 하다는 식의 죄사함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죄사함으로 얻게 되는 의로움은 의로움은 주님의 의로움과 똑같이 완벽합니다.
    지금, 이런 미혹에서 나올 깨우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흔히 "나는 좋은 사람인데 가끔 죄를 짓지만 회개하고 있어.... 그럭저럭 괜찮고 쓸만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은 포도나무는 "아차 실수"하여 때때로 가시를 내고 그때마다 뽑아내고 다시 포도를 내려고 노력한다는 허탄한 말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자신의 주인이 마귀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죄를 짓는 사람은 자신의 소속이 예수가 아니고 마귀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 큰 죄던 작은 죄던 죄를 짓는 자는 무조건 자신이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조금 부드러운 말로 바꾸자면 자신의 옛사람에 속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없이 자기 스스로 행하는 사람이고, 그로 인하여 죄가 흘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가 되어 있으니까. 가시나무로서 가시를 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어떤 때를 말한다기 보다는 "본질상 근본적으로"라고 의미입니다. 그리고 범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본질상 정의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죄이고, 불법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것이 곧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는 죄의 행동이 흘러 나올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 구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다 또는 주님이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영적 재림(Epiphany)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다 고침을 받고 죄사함을 받게 되었을 때 주님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이전에 살펴 본 말씀과 같이 읽어야 할 구절이 입니다. 지난 번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요일3:5]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예수가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예수가 우리를 고치고 죄를 없이 한 후에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타나신 바 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입니다.

  지금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에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나타남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마귀의 일이 멸하여 지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이 멸하여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마귀가 우리 안에서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를 시험하는 마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마귀는 예수의 마음 속에 돌덩이가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신의 생각을 예수에게 주입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마귀의 일이 멸하여 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만일 마귀가 생각을 주었을 때 넘어 가게 되면, 우리에게서 마귀의 일이 멸하여 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바 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 되고 우리 안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나타나신 바 되면 우리 안에서 마귀의 일이 멸해지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마귀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요일 3:9-10]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 안에 나타남으로써, 우리는 죄에서 그리고 마귀에서 해방됩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그동안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지 맨날 죄짓고 회개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명확히 알 수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여기에 상습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라는 단어를 곁들여 자신이 죄짓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죄인으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죄사함에 관해서 지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씨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안에 거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그 사람에게서 죄의 행위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대접의 안을 깨끗이 하였으니 대접의 겉도 함께 깨끗해 진 것입니다(마 23:25-26). 가시나무가 포도나무로 거듭났으니 절대 가시를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구분되고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 개개인 안에서의 문제입니다. 즉 내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없으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이와 같이 아들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가 구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마귀의 자녀로 옵니다. 예수를 만나서 예수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정확히 율법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에 우리 마음을 집중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말씀이 그런 의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지치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지친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그 주님의 인도함에 따라 나서라."

  본절의 말씀은 포도나무는 포도열매, 가시나무는 가시를 맺는 원리를 알면 이 말씀도 잘 풀리게 됩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다는 것이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들 예수가 자신에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마귀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 가시나무에서 포도나무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는데도 계속 죄짓는다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빛에 어둠이 조금도 없는 것 같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습니다. 그러니 죄사함 받아도 죄를 가끔 짓는다는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경범이건 중범이건, 초범이건 상습범이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안에) 나타난 것은 이렇게 마귀에 속한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서 마귀의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난자는 범죄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우리를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마귀의 일을 그치고,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믿습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문서 목록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