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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21-요일 3:17-19)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7-10 23:58 조회 |6,028회

본문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요일 3:17-19]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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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초등학생 이전부터 들었던 내용이고, 교회 밖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매일 듣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누구 하나도 사랑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전 인류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형제를 사랑하고 아껴 주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사랑을 목표로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랑은커녕 시기와 질투, 질시와 반목 그리고 형제를 향한 압제와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 결과는 전혀 사랑의 삶이 흘러나오지 않는 이런 위선적인 사랑이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있는 우리의 엄연한 현실인데도 이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런 상황에 면역이 되어 있고 의례히 그런 것이려니 하며 현실을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깨어 나야 합니다. 정말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 말로만의 사랑을 외치다 마감할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참된 사랑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한 것을 보고 도와 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진리에 속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담대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헛된 사랑으로 살지 말고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로 형제를 돕자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 말씀은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물론 세상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도울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에는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 말씀은 그 근본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구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그 근본에 있어서 이 세상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이라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요 6:27)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받아야 하고 또 나누어 주어야 할 양식은 영적 양식이지 육신의 양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준다는 말씀도 영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 말씀을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구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전 절(요일 3:16)의 흐름과 동떨어진 내용이 되고 맙니다.
  이전 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무슨 뜻일까요?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고,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우리도 또한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것 같이,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자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삶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가난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 양식인 말씀을 주셨고 종국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랑을 받은 제자들은 또한 그들의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가 했던 것처럼 말씀을 주어 그들도 또한 '사랑'을 얻게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가난한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17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의 의미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생명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비오스(BIOS)는 삶

  개역성경의 "재물을 가지고...(17절)는 단순하게 재물로 만의 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준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사실 궁핍한 형제를 제대로 돕는다면 재물을 가지고만 돕는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 정신적 소유, 지식 등 자신이 삶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돕게 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재물(비오스)이란 단순한 물질로서의 재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재물은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말합니다.

  요한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을(16절) 재물을 가지고 형제를 돕는다고(17절)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요한은 여기 재물을 곧 삶(목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물은 삶입니다.

  또 한가지 본문에서 '재물'로 번역된 헬라어는 '비오스(bios)'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총 11회 사용되었고 번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재물 또는 생활비'라는 의미와 '인생' 또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재물' 또는 '생활비'로 번역된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문은 KJV입니다.
막 12:44 - living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
눅 8:43 - living (의사에게 재산을 탕진하고...)
눅15:12 - living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15:30 - living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눅 21:4 - living (생활비 전부를...)
요일 3:17 - good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삶' 또는 '인생'의 의미로 번역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눅 8:14 - life (이 생의 염려와...)
요일 2:16-life (이 생의 자랑...)
딤전 2:2-life (평안한 생활을 하려...),
딤후 2:4-life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벧전 4:3-life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비오스'는 문맥에 따라서 어떤 의미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17절에서는 재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살펴 보았던 대로 그것의 영적 의미는 삶 또는 인생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여기서의 '비오스'는 '재물' 보다는 '삶' 또는 '인생'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삶(비오스)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말씀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형제의 궁핍함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궁핍한 형제란 물리적으로 궁핍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부족하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이 바로 궁핍한 자들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영적인 고아와 과부들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각자의 삶(비오스)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형제의 영적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도와 줄 마음을 막는다는 의미에 관해서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참 예수를 만나면 그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제 그런 우리는 진리의 길을 찾아 방황하는 궁핍한 형제들을 보고 그들에게도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인생으로 궁핍한 형제를 보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가 궁핍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도 그 형제를 멀뚱멀뚱한 눈으로 방관하게 되면 그를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예수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 소경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를 남에게 알려 주기는커녕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형제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을 예수의 일로 생각하고 하지만, 결국 형제의 영적 궁핍함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비오스)을 가지고 형제를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눅10:30-37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 사미리아인의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레위인도 제사장도 비켜 갑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만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서 주막에 들입니다.

  자,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자는 여기서 말하는 '궁핍한 형제'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레위인과 제사장은 자기 '삶(재물=비오스)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막히는 자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이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누가 영적으로 궁핍한 자인지를 구분할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 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오직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구제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그 일을 하면서 아까운 삶을 허비합니다.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레위인과 제사장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율법적으로 예수 믿기 때문에 그저 이 세상에서 배 부르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형제를 구제하지만, 예수님이 볼 때는 형제의 영적 궁핍함을 보고도 여기 레위인과 제사장처럼 피해하는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알면 그러겠습니까마는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한 '삶'을 가진 자로서 레위인과 제사장 같이 궁핍한 자를 비켜가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궁핍한 자를 구원해 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권면하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영적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형제들이 돈이 없고 먹을 것이 없을 때 그들에게 줍시다 또는 먹으라고 합시다 하면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맞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육신적 구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본 뜻이 아닙니다. 그럼 성경의 본 뜻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초반에서 요한은 우리의 죄사함 문제를 말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사랑하려다 실패하고 사랑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그것입니다. 제대로 죄사함을 받으면 형제를 제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형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사함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는 말로만 사랑합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려고 나섭니다. 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열심히 사랑하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본질에 미치지 못하는 말과 혀로 만의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도 우리가 마음을 다하면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는 그런 감정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후천적으로 받아야 하는 사랑입니다. 참다운 사랑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곧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입니다.

  한편, 말과 혀로써 하는 사랑에 반하는 사랑이 있으니 그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우선 행함이란, 단순하게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앞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즉,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그로 인하여 사랑의 행함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치는 그 사랑이 행함의 사랑입니다. 이전에는 말과 혀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행함이 그 말과 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자신에게 임한 지금은 말과 혀로 사랑을 말하고 그것에 또한 합당한 행함도 같이 따라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전에는 자신이 가시나무인 상태에서 포도열매를 운운하며 행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열매로서의 행함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도나무로 변화된 상태, 즉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상태에서는 포도열매를 자연스럽게 맺게 되며 이것이 사랑의 행함인 것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런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어떤 감정적의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헬 : 알레데이아)를 말합니다. 진리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진리로서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가 자신 안에 임한 상태에서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면 우리는 진리를 알고 진리와 하나 되어서 그 진리를 바탕으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삶이고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말과 혀로 하는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임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사랑입니다. 결국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내려는 노력으로 허무한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지금 율법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과 같이...
  반면 행함과 진리로 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포도나무가 되어서 포도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참다운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소중한 하나의 삶이 주어집니다. 이 삶의 기간 중에 정말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참 예수를 만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궁핍한 형제를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 없이 사랑하려고 나서게 되면 말과 혀로써만 하는 사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행함과 진리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행함과 진리로서 형제를 사랑합시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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