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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저 안에, 저도 하나님 안에...(27-요일 4:12-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7-28 19:29 조회 |3,728회

본문

하나님이 저 안에, 저도 하나님 안에...

[요일 4:12-16]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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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동안 우리는 성경에서 주 안에 거한다는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예수님의 말씀도 또한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과연, 예수 안에 또는 하나님 안에 거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교회 열심히 나오고 봉사를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면 예수 안에 거하고, 혹 그렇지 못할 때는 예수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 밖으로 나간 사람은 회개하고 다시 돌아 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참 뜻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참 뜻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하여 우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열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각 절에 공통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서 여러 가지 영광된 모습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낸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 내용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

[요일 4:12-13]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하나님을 환상 중에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았다고 해 보았자 뭐 특별히 자신이 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하나님을 본 사람을 말하고자 하지만, 그 본다는 의미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들 그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영적 의미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 된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를 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33:18-23]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들은 모세가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모형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나안,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한 것의 상징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는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과 하나된 자가 없으되..." 이런 뜻입니다. 모세를 비롯하여 예수가 오기 이전에 율법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합니다. 구원자 예수가 아직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렇게 사랑하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본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임함으로써 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으니 하나님을 본 자가 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쳐 죄 사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는 하나님을 본 자들입니다.
 
  율법시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면 바로 죽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예수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보아도 죽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세가 그렇게 가고 싶어했으나 가지 못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난 초창기, 옆에 입신해서 천국의 집들을 전문적으로(?) 보는 사람한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모세의 집과, 베드로의 집과 바울의 집을 좀 보고 그 차이점을 말 좀 해 달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의문은 아무나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질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그 분은 집을 보고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모세의 집은 높고 큰 성 같은데 그리 빛은 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다이아몬드 재질인데, 밝은 빛으로 빛나고 아무런 조각 없이 통째로 기둥을 세운 모습입니다. 바울도 같은 재질인데 그 기둥에는 섬세하고도 공교롭게 조각들이 있습니다. "
  
  이것이 실제이든 비유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집을 통한 설명을 통해서 이들의 영적 특징을 아주 명쾌하게 보여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위인으로서의 모세, 복음 아래서의 직선적인 성격의 베드로, 또한 서신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울의 섬세함 등이 잘 설명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감히 말해서 우리가 얻을 영광은 모세가 얻은 영광보다 더 큰 것입니다(고후 3:7-11).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절)" 성령은 예수가 우리를 다 고친 다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다 받은 결과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임하셨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구주를 보았고 또 증거한다

[요일 4:14-15]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한다는 말은, 여기서도 육안으로 예수를 보았다는 증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를 고치고, 우리 자신 안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 본 것이고, 그로 인하여 또한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것이나 하나님을 본 것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예수에 이끌린 삶의 과정 없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제쳐 놓고 하나님과 직접 네고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할 테니 성령을 주십시오."
  "주님,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교회에 봉사를 할 테니 나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십시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겠으니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꼭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말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몸으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는 것입니다. 어림 없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몸으로 또는 말로 때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직접 만나서 그 분의 인도함에 따라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요?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 한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 주에 교회의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옳다함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어떤 분은 주님이 자신에게 마음 속으로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도 저렇게 하라!"
  이 분은 생각했습니다.
  '아니, 연장자에게 저렇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데...'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명확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표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저에게 그 문제로 상담을 했고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감동이 맞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그 말씀을 육신적으로 이해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집사님에게 강력하고, 단호하게 자신을 표현하라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그것을 외부의 인정이나 환경에 의해서 묵살하지 말고 강하고 명확하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강하고 굽히지 않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은 때로는 강할 수도, 때로는 부드러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분은 이와 같이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두 번으로 되지 않는다면 주님은 다음에 또 다시 드러내서 지적하시면서 고쳐 가십니다. 이것이 곧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고 증거하는 과정입니다.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다는 의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한다는 의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여 월등한 존재로 높이고 숭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세상적 의미의 능력자가 아니라 구원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마귀가 시험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하면서 예수를 이 세상에 떡을 줄 구원자로서 시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곧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도 조금 있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 능력을 가지게 될 터인데 그것은 형제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시인한다는 의미는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살펴 보았습니다. 즉 예수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을 때 비로소 예수를 구세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구원자로 시인한 사람은 이미 예수에 의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었으니,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14절에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고 증거하는 것"과 여기 15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그들 안에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여러 방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행해 가지고 있는 극상(極上)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이 말씀을 보십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를 보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에 의한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알고 믿었다는 것은 그 예수에 의한 구원의 과정이 우리에게 그대로 진행되고 하나님과 하나되었을 때 알고 믿게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과 하나 된 자이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고,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되는 것은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임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자" 또는 "서로 사랑하는 자",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아들을 구원자로 보낸 것을 알고 믿는 자" 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자"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로 인하여 우리가 고침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영광이 하루 속히 우리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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