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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28-요일 4:17-19)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8-07 15:38 조회 |6,683회

본문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요일 4:17-19]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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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아 가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지 모릅니다. 사실 엊그제 저의 책을 읽고 찾아 오신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심히 기뻤습니다. 그 분 말씀이 기존의 거의 교회에서는 율법을 설교하고 있고, 또 자신이 만나는 큰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도 마음이 곤고하고 허전하다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튼 그 분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 부분에서 서로 마음이 통했고 그래서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 분하고 모든 문제에 있어서 마음이 합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기존의 율법교회들도 교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설명을 해줌으로써 예언적으로 예수를 알게 해 준 측면이 있고, 또한 율법을 전함으로써 그 아래서 교인들을 지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저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그들이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는 논조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분은 저와 마음을 합하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저하고 서먹한 관계를 가진 채 돌아갈 뻔 했습니다. 서로 말하는 도중에 절제를 해서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마음이 맞으면 기쁘고 피차에 담대하고 반대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불편하고 함께 있기가 거북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제가 우리 교인들과 만나서 대화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이 분을 만남으로 기뻤던 것 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느낄 것은 당연합니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한 마음이 이미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 마음이 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개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과 다른 마음, 하나님에 의해서 고침 받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담대하지 못합니다. 께름칙하고 두렵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한 부분이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나고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아 하나님과 한 마음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한 마음이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어질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에게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이렇게 되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와 같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온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면 두려움은 쫓겨 나간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형벌이 존재할 수 없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랑이 임하는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과 두려움을 통하여 조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룸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우선, '이로써'는 문맥상 앞 절을 받는 것으로 봅니다. 앞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즉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면 이로써...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예수에 의해서 우리가 온전히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랑이란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로 인하여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과정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쳐야 할 과정과 단계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기까지 3년 반과 부활 후 40일의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오는 이런 점진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를 만난 우리들은 각자 자신에게서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 지는 위의 기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에게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게 됩니다.

+ 심판 날에 담대함

  이렇게 사랑이 우리에게 이룬 것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함입니다. 여기서 담대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정죄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진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아서 자신에게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려면 예수에 의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게 되면 죄 사함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무너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이미 죄 사람을 받았고 이런 사람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심판 날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심판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심판을 그렇게 이미 통과한 사람은 미래의 어떤 심판 날에 심판을 받지 않고 담대합니다. 이미 심판을 통하여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빗겨 간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으로 이 땅에 온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혼자 심판 받으면 죽고 다시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예수와 나 자신이 연합하여 받게 되면 그 죽음의 심판을 통과하여 예수와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와 연합하여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예수와 연합한다는 말은 예수를 삶 속에서 만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따라 고침을 받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결국 심판을 받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라기 보다는 같은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심판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심판 날은 언제를 말합니까? 이것은 제자들로 치면 예수를 만나서 고침을 받는 3년 반이라는 세월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과정에 있으니 지금이 심판의 때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에 의해서 고침 받아야 할 것들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렇게 드러나 고침을 받게 되면 그 점에 있어서 차후 그 면에 있어서 심판이 있을 경우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이미 이전 심판으로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어느 집사님이 자신이 물질에 너무 의지하는 것을 지적 받았습니다. 자신의 통장에 있는 예금 잔고에 만족하면서 그것을 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 분의 모습을 지적하였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부딪히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심판 때인 것입니다. 이때 이 분은 자신이 물질에 미혹되어서 물질을 주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 분은 그것을 헌금으로 드린다든지 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했다면 이 분은 물질에 관한 집착에 있어서 주님 앞에서 담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그런 자신을 깨닫지 못했고, 이것은 심판 날에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주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질에 이끌리는 마음이 주님의 주신 말씀보다 우선했기 때문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 날에 주님 앞에 담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 후 이 분은 요즈음 유행하는 보이스 피싱에 어처구니 없이 당해서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은행 잔고를 몽땅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으로 이 분은 회개를 하고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물론 물질에 대한 집착이 한 두 번의 이런 사건으로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주님이 물질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고쳐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침 받는 과정이 단번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물질에 관하여 우리도 주님이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앞으로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과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고침을 받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후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주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그 심판이 언제일지라도...) 주님과 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담대함을 누리게 됩니다.

  "주의 어떠하심 같이 우리도 그러하니라"
  심판 때 왜 담대함을 누리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이 이미 심판을 받아서 주님과 하나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 것에 미혹되어 주님의 뜻과 마음을 무시하거나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번 고쳐야 할 부분이 주님에 의해서 드러나고 - 이것이 심판입니다 - 그것에 심판을 받음으로써 그만큼 주와 한 마음이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된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심판을 거친 사람은 바로 그는 예수와 같이 되고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심판이 필요 없고 심판이 있어도 그때는 담대함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기준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의 어떠하심 같이 우리도 그러하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본 절 말씀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 되면,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심판 때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나 하면 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아서 예수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없이 합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사랑 안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안이라는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이전 절의 담대함과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담대함이란 우리가 심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된 상태임을 보았습니다. 이때가 곧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에게는 담대함이 있고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이 두려움이란 하나님을 볼 때 우리가 두려움으로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비유를 하자면 주인과 그 주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종의 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주인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말씀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과 한 마음이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것입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런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눅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사랑이 온전히 우리 안에 임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쫓겨나게 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만일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형벌도 남은 것입니다. 사랑 안에 형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과 형벌은 어떤 관계일까요? 앞서서 두려움은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서로 다를 때 두려움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세상 재물에 집착하고 있는데 주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재물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마음 속에 께름칙함과 불만족과 곤고함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두려움의 산물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을 간직하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참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치유함 받게 됩니다. 치유방법은 주님과 어긋난 마음을 드러내고 깨닫지 못할 때는 연단을 주심으로 고치십니다. 위의 어느 집사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분이 세상 재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깨우쳤고 그것을 알아 듣지 못하니까 보이스 피싱으로 연단을, 여기서의 표현으로는 형벌을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주님 안에서 형벌과 연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이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님과 한 마음 되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형벌이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서도 나옵니다.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영벌도 말씀에 의한 연단을 말하고 그것을 통과함으로 우리는 온전한 영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형벌이 아닙니다.

  이렇게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고 또한 형벌도 내오 쫓습니다. 온전히 사랑을 이룬 사람은 두려움도 없고 또한 그로 인한 형벌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미 다 거쳤기 때문입니다.
  만일 두려워 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사랑이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것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요일 4:16)은 어떤 감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우리에게도 아가페 사랑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아가페 사랑이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그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심판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형벌도 필요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아가페 사랑을 받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또한 편으로는 해산의 고통이요 연단과 시련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남은 인생, 아름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맺는 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함으로 아가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심판을 거친 사람들이고 또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심판에 의해서 우리가 고침을 받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같은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 마음이 어긋나는 데서 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위치가 죄의 위치에 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형벌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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