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 [눅 18:9-14]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 |10-10-16 20:20 조회 |6,691회본문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
[눅 18:9-14]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1. 들어가는 말
우리 인생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온 인생은 하나님의 선이 아닌 자기자신의 선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각자가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이 세상은 아무리 선한 삶을 살고자 하나 분쟁과 시기와 악이 횡행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생의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 좋은 방법을 연구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전 조상들이 해 오던 대로 “선하게 살자”, “착하게 살자”는 식의 교훈을 주고 받으며 세상이 좋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일찍 접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은 이미 지나온 역사와 현실이 증거합니다.
진리를 찾는다는 기독교에서도 그 길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기독교 자체도 이미 세상 “사람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종교에서 벗어 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마저 하나님과 성경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 사람의 말과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하게 살자!” “착하게 살자.”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가르친다고 말씀합니다.
[막 7:7-9]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친 결과는 뻔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에서의 선 추구로는 선한 삶을 살 수 없듯이, 세상 선에 입각한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과 세상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예수에 의한 심판과 그것을 통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제대로 된 선을 행하며 남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예수에 의한 심판과 고침의 과정은 필수입니다. 이 길이 제대로 예수 믿는 좁은 길입니다. 사람들은 이때의 아픔과 연단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고침의 길을 피해서 넓은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분리로 마음이 허전하고 곤고합니다. 그것을 채우고자 선을 행하고 열심을 내서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려 하나, 전부 스스로에게 속아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유사선, 즉, 자신에 의한 선 추구를 하나님을 따르고 예수를 믿는 생활이라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불순종인 것입니다.
.
예수의 심판과 고침의 과정을 잘 견디어 내는 사람은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실로, 심판과 고침의 과정 중에서 고침을 받는 부분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혼자 독립하여 살려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곧 악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심판 받으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참된 선으로 삶을 사는 자가 됩니다.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18장의 흐름을 다시 한번 보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에 의한 심판과 고침의 과정이 필수인데, 이때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 하시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인 우리가 죄인이라는 기본 인식 아래 예수를 순종하여 따라 나서고 심판과 고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 자신이 죄인임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만져 주시기를 바랐지만, 제자들이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도 세리와 같은 상징성을 가진 자들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세리와 같이 어린아이가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자 어떻게 이런 계시가 되는지 같이보시겠습니다.
2.2 본문강해
2.1 어린 아기와 만져주심 (눅 18:15-16)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여기서 아이란 유아입니다. 부모들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아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부모들이 아이를 예수께서 안수하여 주심을 바라고 데리고 오니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꾸짖었는지는 여기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그들의 하는 행동을 예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즉,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왜 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고 가르침을 방해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자들의 꾸짖음은 잘못된 것일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행동입니다.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배시간에 시끄럽게 우는 아이가 있어 예배에 방해가 되면 성도들이 “왜 그 아이를 예배시간에 데리고 와서 예배를 방해하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당연히 꾸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시니까, 예수님 편을 들어서 제자들의 그런 행동을 심판하려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우리보다 그렇게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 아닙니다.여기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가 나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는 말씀을 놓고, 예수님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셨고, 그들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방해가 되어도 용납하라고 하셨다는 식으로 세상 자비와 너그러움을 보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혹시, 예수님이 지금 이런 상황에 계신다면, “어째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생명을 받는 소중한 시간을 방해 하는 것이냐? 당장 데려다 주고 와서 말씀 들어라!” 이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보다 더 심하게 부모들을 꾸짖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막연한 망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예수의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지금의 이 장면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설명할 훌륭한 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의 포인트는 “아이”와 “주님께서 만져 주심”입니다.
첫째, 아이입니다.
아이는 “마 19:13과 막 10:13”에서 “파이디아” (7세 미만)로 썼고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젖먹이를 뜻하는 “브레페”를 썼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아이의 특성을 들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얹혀 있는 존재이고, 부모가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처리하여 이끄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 나섭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돈을 벌지 않아도 학비를 걱정하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도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공급해 주시는 부모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모 안에서, 그냥 사는 것, 이것이 이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들은 부모 안에서 안식하는 자들이고, 이것은 곧 우리가 아버지인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할 모형입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6:26-30]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아이인 자들의 모습입니다. 나 잘났다고 또는 안다며 선을 행하겠다고 무작정 나서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어린 아이들입니다. 순종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자들로 만들어 나가십니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 선을 행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가 가계에 보탬을 주겠다고 일하러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젖먹이가 벌떡 일어나서 먹을 것을 찾겠다고 나서는 것만큼 무모하고 황당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선을 행하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돌아 다니는 동안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전 절에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 식의 너희 옳다함과 선 추구를 내려 놓고, 나를 따르면 너희는 어린 아이가 될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둘째는 만져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만져 주시는 이 모습은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입니다. 즉, 주님께 순종하여 어린 아이와 같이 된 자는 예수에 의한 심판과 고침의 과정을 다 거친 자이고 그는 “예수님이 만져 주심”으로 상징되는 “예수님과 하나 됨”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와 하나되는 것은 예수를 자신 안으로 영접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만져 주시는 이 장면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길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은 자가 어린 아이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지 않는 자 (눅 18:17)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앞서 우리 인생의 기본 구도에 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 왔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겉으로만 찾고,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직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려는 목적으로만 찾습니다.
그런 기도가 헛될 것은 뻔합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게 사는 것을 성경에서는 사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잠시 잠깐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어떻다는 것을 체험하고 돌아 오라고 허락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면서 오직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춥고 떨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찾아 따뜻함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저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믿고 따르려고 한 두 발짝 갔더니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등 옛사람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사로 잡혀 저쪽 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십자가에 죽어야 할 옛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까운 인생의 시계는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옳다함을 주장하는 것이고, 이러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은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옳다함이 하나님의 옳다함을 누르고 이기는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인 것이지요. 그 결과는 결국 사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이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옳다고 생각되는 대로 몸을 움직여 따라 나서십시오.
[고후 10:5-6]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위의 말씀처럼 어린 아이는 예수에 의해서 심판과 고침의 모든 과정을 거쳐서 세상적인 생각,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각들이 다 정리되어 예수와 한 마음이 된 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부모에 얹혀 사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고 이때. 어린 아이는 필요한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공급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든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받들어 모시는 무엇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은 우리가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나라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번역이 되었든,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3. 맺음말
주님이 우리를 아이로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로 인도함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자기 옳다함을 내려 놓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론과 선, 옳다고 하는 생각에 찌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함 앞에는 그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씀 드리는 것이고, 혹 그 길을 가기를 소망하신다면 그 길로 이끄시는 살아계신 주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아이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남은 인생 예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이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 나라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