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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눅 18:28-30]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 |10-11-11 20:43 조회 |6,771회

본문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눅 18:28-30]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

1. 들어가는 말

욥기를 통하여 이상을 통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엘리바스와 하나님의 고난을 받은 욥의 신앙의 차이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엘리바스와 같이 은사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것에 반응하는 식의 믿음은 죄인인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죄사함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반면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고침을 받는 자의 본이 되는 욥은 재산과 자식들과 생명이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르고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말을 듣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욥이 하나님을 잘못 믿은 것 같지만, 욥에게 상담을 해주며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힘있게 말하던, 엘리바스는 나중에 욥에게 기도를 받고서야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엘리바스적 신앙에서 머물기가 쉽습니다.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 욥기 가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바스의 신앙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부자 관원과 제자들의 사이도 이와 같습니다. 부자관원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는데 순종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유서처럼 열심히 지킨것 입니다. 이것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 금 집과 다이아몬드 집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은 열심히 했을지라도 주님에 의한 고침은 없습니다. 죄인이 고침을 받지 못하니 죄인인 상태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다가 지옥 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원과는 달리, 제자 들은 하나님의 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 3년 반의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 계신 예수에 의해서 자신이 고침 받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재산과 자식들 과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려 놓게 됩니다. 이것이 욥이 자신의 재산과 자식과 목숨이 경각지간 까지 갔던 것의 실체입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살펴 볼 말씀의 제목인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이며, 예수에 의해서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런 고침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이제 남은 인생, 귀신 들려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성경은 보편 타당한 인간 상식에 입각하여, 가끔 환상이나 보면서, 엘리바스나 부자 관원 같이 믿음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침을 받고 모년의 욥과 같이, 사도들과 같이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요

지난 말씀에서 관원은 선행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부족하여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을 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놀라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니, 예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에서 보시는 대로 베드로가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는 저 관원과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습니다. 하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은 금세에 있어서 여러 배로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따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자, 과연 어떤 것이 우리의 것을 다 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함께 보시고,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 구원의 관계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본문강해

2.1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시작 (눅 18:28)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
관원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가 자신의 궁금증을 말합니다. 사실 이런 베드로가 우리로서는 고마울따름 입니다. 우리의 궁금한 점을 잘 알고 질문을 하니 예수님으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보면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가만히 계신 분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궁금한 점을 질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질문함으로 올바른 길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의 질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부자 관원이 물리적 재산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근심하며 예수를 따라 나서지 못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나는 물리적 재산도 없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니, 여기에 어떤 보상 이 있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어구를 비롯하여 모든 재산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 다. 재산에 미련을 둔 관원과 비교하면, 믿음이 더 좋은 것으로 생각되고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그런 결단과 행동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있었고, 부자 관원의 그런 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린 이유는 그것을 버리고 더 많은 세상 것을 얻으려는 욕심에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힘으로 고기를 잡아 보았자 그날 그날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상황인데, 예수의 말을 따르니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고기 없는 것을 버리고 고기 많은 것을 찾아서 나선 것입니다. 베드로의 관심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의 고기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 에 대하여 여전히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br>
마태복음에서도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미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했고 (마20:21) 이에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마 20:24)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어부’에서 이 세상 왕국의 ‘영의정’, ‘좌의정’의 자리를 바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버렸다고 하지만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그럼 관원은 이 세상 것을 원하지 않고 영생을 원했으니 그는 영적인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가는 저 천국을 소망하는 것도 결국은 세상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서 고침을 받아 죄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 고침을 회피하기 위한 기묘한 방법이 죽어서 죄 없는 존재가 된다는 헛된 생각입니다. 이것이 사후 천국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본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육에 속한 존재인 상태에서는 그 바라는 모든 것이, 영생이든, 천국이든, 믿음이든, 하나님의 나라든, 구조적으로 육신적인 세상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관원이 영생을 바란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이 말하는 영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고침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신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우리는 육신적인 것을 바라면 안 된다. 그것은 치졸한 기복신앙이다. 모든 세상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죽어서 영원히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바라고, 이 세상에서 예수의 향기를 날리면서 봉사해야 한다. 그것이 영적인 삶이다”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매우 희생적이고 영적인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봉사함으로 저 천국에 간다는 그 자체가 속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심판을 받고 고침을 받아야 하는 때이지, 일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물론 제대로 고침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감히 논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침을 먼저 받고 그때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고침을 뒤로 하고 일하려는 자들은 전부 귀신에 속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 옛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관원과 같은 부자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영생을 바라는 부자 관원이나 베드로나 공히 “인간의 육신적인 노력”의 대가로 영생이나, 구원이나, 세상 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이미 선언을 하셨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인생들은 자기 편한대로 신앙생활하고 나중에 주님께서 “내가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고 하면 그때서야 울고 불고 난리를 칩니다. 지금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관원이나 둘의 마음 속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 모든 것을 버린 자 - 주님이 인도 (눅 18:29-30)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런데도 베드로는 나중에 사도로서 예수의 향기를 내는 삶을 살았고 관원은 열심히 구제 봉사를 했지만 예수와 상관없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를 따라 나서서 고침을 받았고, 관원은 지금과 같이 자신이 받지 못할 말 한마디에 예수를 떠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마음이 있을 지라도 끝까지 예수를 따라 나서서 고침을 잘 견딘 사람이 제자들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했을 때 물리적으로는 그렇게 했을지라도 그 자체로 예수를 진정 따를 자격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면 오직 고침 받을 준비가 된 것뿐이고, 실제로 예수를 따르면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스스로의 결단으로 버리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고, 실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은 예수를 따르면서 고침을 받은 이후에야 그런 사람이 되며, 그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여기서도 베드로의 육신적인 질문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의 육신적 의미)에 영적인 대답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의 참된 의미)을 주시는 것으로 동문서답이 진행된 셈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 세상 것에 우선시해서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고, 그래서 고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관원처럼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애초에 고침을 받지도 못합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이 관원과 같이 세상 물질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좀더 가까이서 믿으면 나의 재산을 헌금하라고 할 것이야,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믿어야지 이대로 가다간 얼마 안 있어서 내 재산 전부가 교회 재산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현대판 관원이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는 이런 말씀을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페르샤의 왕비로 세우시고 그를 쓰시고자 할 때, 그는 죽을까봐 그 말씀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르드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4:13-14]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는 왕 앞으로 나갔으나 죽지 않았으며, 그 순종으로 더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물질이 있는 것은 내가 잘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쓰고 그리하여 우리를 영광스럽게 높이기 위한 계획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지금 이런 환경이 있는 줄로 알고 그 물질에 매여서 노예생활을 하느라고 주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돈이 없다. 그래서 돈을 벌어서 주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에 주일에도 일하고, 수요, 구역예배 참석도 우선 순위에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지원해 주실 것이다.’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라도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항상 모시고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뜻에 우선하여 순종하지 세상 일을 주님의 일에 우선하지 않습니다. 세상 일도 모두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은 우리가 세상 일을 우선시 하나, 주님을 우선시 하나, 보고 계십니다. 전자는 재산이 있는 부자 관원, 후자는 재산이 없는 부자 관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려야 한다니까, 에라 모르겠다고 집을 나오고 그렇게 예수를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집이나 아내나 형제자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 가정이 싫어 도피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버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일은 예수님의 고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고침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다는 것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고 주관하는 일들이시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안고 업고 다닌다고 될 문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말로 안됩니다. 여러 번에 걸쳐서 드러나고 책망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게 되며, 앞으로는 그런 세상적인 요소들에 마음이 휘둘려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자신의 눈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세상 것에 대해서 손을 놓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실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따라 나왔다가도 주님의 고침의 손길을 보고는 이리저리 피하고 가진 술수를 써서 도망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직도 세상에 재물을 두고 그것이 놓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말씀이신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영적이 모습을 보고 속속들이 지적하며 정신차려라, 귀신에게 속지 말고 순종하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면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 속에서도 세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과정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 이런 때 아프고 쓰리고 정신이 혼미한 경우도 있지만, 다 주님의 뜻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더 자신이 고침을 받아야 산다는 그 한가지를 마음 속에 꼭 담고 다시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욥 4: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이 짧은 인생,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져가려 합니까? 예수를 따라 그 예수를 얻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에 의해서 고침 받는 현장에 없고,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물질이나, 구제, 금식, 헌금한 의로움 등은 하나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에 의해서 고친 부분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이니, 그때 자신이 인정 받을지 아닐 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판단에 따라 행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진정 이 세상 모든 것, 우리의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 이렇게 이 자리에 함께 있지만, 부자 관원도 있고 베드로도 있습니다. 참다운 고침의 말씀이 없는 교회에서는 모두 부자 관원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생명의 말씀과 그로 인한 영적 죄사함과 고침이 있는 이곳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원하며 얼마든지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고, 또 주님께서 이리로 오라고 초청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초청에 따라 끝까지 순종하고 행하면 참다운 제자의 길을 갈 것이요, 초청에 근심하여 거부하면 저쪽에 그냥 남아있는 관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바탕으로, 저는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의 주제인 “우리의 것을 다 버린다”는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만이, 예수에 의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영생이다.”

2.3 금세에 여러 배, 내세에 영생 (눅 18:30)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자 이렇게 예수를 따라 나서 드러나 고침을 받으면, 금세에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금세에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은 집이나 아내나 형제 자매에 대한 생각이 더욱 명확해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잘되고 물질이 축복으로 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라도 사도바울의 다음 말과 같은 경우입니다.

[고후 6:9:10]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금세에 여러 배로 받는다는 것은 곧 내세에 영생을 받은 자가 되는 것과 동격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자는 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은 자이고, 여러 배를 받은 자는 곧 내세(올 세상=하나님의 나라의 세상)에서 영생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예수에 의해서 끝까지 견딤으로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를 따라 나서면 한 명의 아내를 몇 배로 받게 된다는 말씀은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3. 맺음말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것에 우선하여 예수를 따라 나서야 하고,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 과정에서 도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딴 짓하고, 모른척하지 말고, 또한 열심을 내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의 참 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예수에 의해 모든 것을 버리게 된다.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영생이다.”

모든 열심으로 끝까지 예수를 따라나서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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