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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눅 19: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admin 작성일 |11-01-31 22:05 조회 |3,714회

본문

[눅 19:1-7]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

1. 들어가는 말

성경 말씀은 오직 여러 가지 비유와, 역사적 사건으로, 신화의 형식으로, 개인 간증, 또는 묵시의 형식으로 기록 되어있지만, 그 모든 것이 말하는 바가 인간이 예수로 인하여 고침을 받아 눈을 뜨고 새로운 사람으로 구원을 받는 길, 그것 한 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그 어디의 기록이라도, 형식은 달라도 그 영적 내용은 같으며, 곧 성경 전체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성경의 기록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기록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할 나는 같은 내용의 말씀을 구원 받기까지 듣게 됩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영혼이 힘을 받고 살게 되는 때가 오게 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구원 받는 자, 그리고 구원 받은 자들의 모습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010년 우리교회에 주신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런 말씀의 양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생명양식으로 받지 못하고 지식으로 받아서 그 말씀의 반복성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이 듣던 말씀이고 예측 가능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 외형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식사를 할 때,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은 먹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것을 먹어야 자신이 산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할 때는 그 식사의 외형만 보게 되고, 분석을 하게 됩니다. 매일 쌀이다, 매일 밀가루다, 매일 빈대떡이다 하며, 겉껍데기 분석만이 눈에 보일 뿐입니다. 아직 배가 덜 고파서 세상 것에 정신이 팔려 생명의 말씀을 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아는 것 같지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먹는 것이라는 것은, 말씀을 먹고 그 말씀에 의해서 새 힘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말씀이 지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의 위치는 역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을 하다 보니 강해시간처럼 되어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이 성경말씀 또한 똑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청년에 이어서 여리고의 소경, 그리고 오늘 살펴 볼 세리장 삭개오에 관한 말씀도 포장은 다르지만 그 내면은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고침을 받고 예수와 하나되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자는 그 내용입니다.

개요

자 오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의 행동과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똑같이 계시되는 하나님의 나라, 구원에 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부자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원합니다. 앞의 사람에 가리워 예수가 보이지 않자 삭개오는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를 보고자 했고, 예수가 그리로 지나가시다가 그를 보고 내려 오라시며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니 삭개오가 기뻐하며 내려와 집으로 영접하자 사람들이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였다고 수근거리는 장면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이 삭개오의 행동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는 영적 구원의 길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고 가야 할 길입니다.

2. 본문 강해

2.1 세리장 삭개오 (눅 19:1-3)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우리가 이전 말씀에서는 여리고 소경에 대해 살펴 보았고 그가 눈을 떴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영적으로 세상 것이 다 인줄 알고 그것만을 찾고 울고 불고 하던 그가,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결국 놓고 갈 것이라는 것을 예수의 고침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고치고 남도 고치는 길, 그 영생의 길을 새로운 가치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제 세상으로 비유된 여리고에서 부자 세리장 삭개오가 등장합니다. 이 세리장 삭개오도 눈을 떠야 할 영적 소경인데, 여기서는 세리로 등장합니다. 세리와 죄인과 창녀의 부류는 당 시대에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던 소위 말해서 왕따된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발 붙일 소망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삭개오는 예수를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런 모습은 자신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 물질을 찾느라고 머리가 희어지고 허리가 굽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뼈빠지게 고생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런 과정을 이미 거쳐서 그것의 허망함을 알고 이제나 저제나 그런 세상에서 나올 마음을 가진 사람의 부류를 말합니다.

반면 같은 부자이지만, 예수를 따르지 못한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리적 돈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인정 받고 선행도 해서 영적으로 부요한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부요한 자였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세리와 죄인처럼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선행도 했기 때문에 인정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즉, 나는 죽어도 천국 가고 나는 잘났다는 “자기 사랑” “자기 의로움”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부요함이 예수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부자 관원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잘났다 함, 귀신들린 자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를 따라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딴 사람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리하자면, 외형적으로는 삭개오도 부자이고, 부자 관원도 부자입니다. 내면에 있어서 삭개오는 인생에서 지치고 세상에서 버려진 하나의 잃은 양이었고 부자 관원은 99마리의 나 잘났다는 양의 무리에 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신의 내면적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예수를 따라나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런 삭개오가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문에 나와서 예수를 보고자 했습니다.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런데 나와 보니 자기 키가 작아서 예수를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존에 예수 믿는 무리가 정해 놓은 신학이네, 교리네 하며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한다 해도 이런 것들은 참 예수그리스도를 종국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를 믿으러 교회에 나오지만 우선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무리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적인 예수입니다. 삭개오가 지치지 않았다면 그들 사이에서 “만족합니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참 예수를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고, 이런 신앙생활에서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자 여러분 여기 이 기록이 우리가 함께 읽은 여리고 소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보십니까? 여리고의 소경도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문에 그를 보고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에 예수는 볼 수 없었고 오히려 핍박이 들어 왔습니다. 조용히 하라고...여기서 삭개오도 예수를 보고자 해서 나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길이 쫙쫙 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벽에 가로 막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키 작은 삭개오는 집으로 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여리고 소경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변에서 조용히 하라고 하니까 이때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어떻게 했을까요?

2.2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눅 19:4)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는 뽕나무로 달려가 그 나무에 올라갔는데 예수가 그리로 지나가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삭개오를 통해서 또는 여리고 소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를 원하고 원하는 자만이 만나고 그래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을 내어서 살려고 하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투정 다 부리고 세상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팽개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뽕나무는 쉬코모레아 (sycamore)라는 원어로 뽕나무처럼 생긴 이집트 무화과나무라고 합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그 나무에 올라간 결과로 예수를 만나 집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나무는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게 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만나서 그 예수를 집안으로 들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따라 나서서,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 후에 예수가 우리 각자의 집에 임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는 결국 나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고, 그가 뽕나무에 올라 갔다는 것은 삭개오가 열심을 내어서 주님의 인도함에 불평 불만 하지 않고, 투정부리지 않고 따라 나서서 결국 그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예수와 연합하여 죽고, 예수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하나된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지나가시는 길로 가야 그를 영접하여 하나가 되어 눈을 뜰 수 있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곧 뽕나무 위, 즉 자기 십자가로 가는 길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기록한 것은 삭개오가 그랬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자 관원과 소경의 기사, 그리고 여기 삭개오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물론 이 십자가를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물론 한두 번 말하면 되지요. 그것을 못 알아 들을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 순종하고 함께 따라나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 그렇게 하나요? 그렇게 순종하고 따라 나서야 그만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성경은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듣고 행하고 순종할 때까지 그 말을 반복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질문하면 대답을 잘하고, 이해 잘하고 맞아하며 저절로 동의되고 하니, 이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이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도 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말에 분을 내고, 불평 불만을 하시는데 그 모든 것이 듣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은 육신의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고, 예수님이나, 성경이나, 자유교회의 말씀은 여러분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끌고 계신 영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 한 둘을 허락하심에 큰 위안이 됩니다.

2.3 영접하거늘... (눅 19:6-7)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영접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이고, 우리가 잘아는 대로 요한복음의 말씀이 이 삭개오에게 성취된 때입니다.

[요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것은 죄인과 동등인 세리의 집에 들어감을 보고 이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과연 이것을 보면 삭개오가 기존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보다 약하고 키가 작다고 표현한 그 상징성을 볼 수 있습니다. 멸시당하고 같은 공동체에서 쳐주지도 않았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의 집에 들어 갔으니 사람들이 수근 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수근거림이 불평 불만이고 그렇게 불평 불만 하는 동안 자신들은 정확히 보고 그런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소경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소경들의 불평 불만을 예수께서 들어 주실까요? 소경이라서 그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을 절대 따라 가실 수가 없습니다. 소경이 자신의 옳다함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성질을 낸다 한들 보는 사람이 그를 따라서 구덩이에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에 의해서 제대로 구원 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기때문에 그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거듭난 삭개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또한 알지 못하기에 삭개오를 판단합니다. 삭개오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교회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자유교회에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3. 맺음말

이 세상에서 애통하는 자, 영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듯이 이 세상에 만족이 없고 더 이상 소망이 끊어진 자들이 천국을 제대로 따라 나설 수 있습니다. 노년에 연금 준비하고 관은 향나무 관으로 할까 무엇으로 할까 하는 것은 전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의 모습이요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보러 뽕나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바로 그곳이 예수를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듣고 순종하여 따라 나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말씀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유교회
목 사
정 덕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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