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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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2-07 17:32 조회 |6,520회본문
[눅 19:8-10]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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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이런 사람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은 타락했고 타락한 이후로 땅에 가득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패괴하고 악을 행하는 존재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음을 후회하시고, 그들을 노아 때 홍수를 통하여 땅 위에서 멸절시키십니다. 이런 노아의 홍수 심판 후에 그들의 자손 중에서 “아브람”을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삼 대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야곱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해 냅니다. 그들이 애굽에 정착하는 것이 창세기의 내용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우리 인생 개개인의 영적 상징인데,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타락한 하나의 아담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적인 면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계획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생육하고 번성한 삶을 꾸려 나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와 생각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생명에서 이탈한 상태에서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망 중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창조한 것을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소망이 있으십니다. 그런 우리들을 심판하시고, 우리로부터 새로운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응답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이삭과 야곱의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이 땅에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와서 믿음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거듭나게 되며, 이런 내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나에게도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영광스러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자, 오늘 세리장 삭개오에게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개요
삭개오는 예수가 지나 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나와서 예수를 볼 수 없게 되자,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를 만나게 되고 집안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구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며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얼핏 세상적인 눈으로 이 말씀을 읽으면 삭개오가 부정 축재한 것과 그 동안 모은 재산을 사회에 헌납한다고 고백을 하니까, 예수께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너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과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은 이런 말과 잘 연결이 안되니까, 그냥 잃은 자, 소외된 자를 찾아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으로 대충 읽고 지나갑니다. 성경을 이렇게 읽어도 될까요?
자, 주님께서 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시는지, 재산의 반과 토색한 것의 사배로 갚겠다는 것 등의 참다운 영적 의미, 우리가 속한 세상을 땅에서 하늘로 변경시키시는 말씀의 뜻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2. 본문강해
2.1 내 소유의 절반과 토색한 것의 사 배 (눅 19:8)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삭개오가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은 사 배로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말씀 드린 대로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이 세상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는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때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는 그 말과 행동으로 진리의 세상을 계시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고, 이 진리의 뜻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성경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삭개오에 관한 기사를 읽기 전에 한 부자 관원에 관한 예수님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 관원은 자신의 소유를 팔 수 없어서 예수를 따를 수 없었지만, 이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예수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선행을 했다는 의식”을 말하고 이것은 곧 자기 의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생은 크던 작던 어떤 형태로든지 이 소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유는 진리의 실체인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선행을 한다는 인식이 자신 안에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했다,” “나는 잘났다,” “나는 우아하다” “나는 선하다”는 생각과 그로 인한 자신의 삶 전체는 가난한 자에게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삭개오는 소유를 가지고 있던 육에 속한 자의 상징입니다. 그는 그 소유, 자기의를 가지게 만드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런 자신 존재의 소유는 예수를 만나서 고침을 받고 그런 소유가 없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비로소 그 소유를 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를 팔라는 말씀은 삶에서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를 따라 순종하고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예수와 함께 못 박아야한다는 내용입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것은 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 상태임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주면, 즉 옛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옛사람의 소유가 0이 되는 것일 텐데. 어떻게 여기서 삭개오는 반을 주고 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면 이때 옛사람으로 인한 우리의 소유는 0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주는 것은 내 소유의 절반을 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인 고유의 ‘나’는 귀신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사로 잡힌 ‘나’가 내 대신 나를 살고 있고, 그 자가 내 몸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내가 힘을 못쓰고 유사선을 추구하는 귀신에게 사로 잡혀있는 형국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 안에는 ‘나’ 가 있고 사로 잡힌 ‘나(옛사람)’가 있습니다. 힘을 쓰지 못할망정 ‘나’와 사로 잡힌 자(옛사람)는 50:50입니다. 사로 잡힌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나의 반이 못박히는 것이고, 그것이 내 소유의 반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유의 반이나, 소유 전부나 같은 뜻을 말합니다. 소유의 반을 준다 라고 하는 것은 소유를 만들어내는 존재의 원천이 옛사람과 새사람의 두 부분이라고 계시하는 것이고, 소유 전부라고 할 때는 옛사람에 잡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소유이기 때문에 행동 차원에서 말할 때는 전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소유의 절반을 팔라, 네 소유를 모두 팔라는 말은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는 존재에서 하나는 그 존재로 인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토색한다는 것은 사기쳐서 빼앗아 온 것을 말합니다. 삭개오가 정당한 방법이 아닌 속여서 취한 것을 4배로 갚겠다합니다. 미래형이 아니라 삭개오가 십자가의 과정을 통과한 것은 이미 사 배로 갚는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럼 삭개오의 말이 의미하는 영적 내용은 무엇일까요?
지금으로 말하면 삭개오는 그 동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나와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을 하면 구원을 받았다거나, 또는 자유교회에 와서 깊은 말씀을 잘 듣고 대답을 잘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거나, 나는 우아하고 멋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다운 구원을 사기쳐서 가져 온 것입니다. 토색한 것이지요.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면 정식 과정을 거쳐서 그 구원을 가져 오게 되고, 그것은 곧 십자가 사건을 자기 것으로 체험해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십자가 체험의 과정을 세분화 하면, 처음에 예수를 만나서 연단 받아 드러나고 고침을 받아 온전한 회개를 거쳐 예수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배열 순서에 따른 믿음의 성장과정에서 예수를 처음 만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사복음서의 단계이고, 길가 밭, 돌밭, 가시밭에서 좋은 땅에 이르는 사 단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풍병자가 예수 앞으로 인도될 때 4명이 그를 메고 가는 이 모습이 바로 4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막2:3-5]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삭개오는 이전에는 이런 4단계를 건너 뛰어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으니, 토색하여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보기 위해서 따라 나서서 십자가까지 체험하였으니, 4단계를 다 거친 것이고, 이것이 그가 토색한 것을 4배로 갚겠다는 말의 영적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도 토색한 구원을 4배로 갚아야 비로소 삭개오와 같은 참다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2.2 아브라함의 자손 (눅 19:9)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와 같이 십자가 사건을 거치면 곧 구원이 그 사람 안에 이르게 된 것이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임하여 나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눈을 뜬 자가 되는 것이고 이런 사람은 이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믿음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예수에 의해서 고침을 받아서 십자가 사건을 겪고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대화를 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십니다.
[요8:37-40]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리새인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예수를 알아보고 예수를 공경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됨은 토색하여 가져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삭개오는 4배로 갚음으로서 제대로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만났을 때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토색하여 가지고 있는 믿음은 참다운 복음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고 고침을 받아서 사 배로 갚음으로 참다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과정은 결국 예수에 의해서 우리가 고침을 받는 과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소망을 가지고 가는 이 길입니다.
주님의 드러냄이 없었다면, 우리 안의 옛사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고 휘두르는지도 모른 채 비참을 삶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비록 위선적이기는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그때가 더 이성적이고 상큼한 삶을 살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의 길로 가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셔서 이렇게 저렇게 역사하시고, 지금은 그 옛사람이 아주 밖으로 완전히 드러나서 여러분을 이리 저리로 이끌고 다니는 것을 목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지혜롭고 판단력이 있게 보이던 사람들도 이 옛사람이 드러나면 정말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하는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하나 고치시기 위해서 드러낸 결과입니다. 눈을 가려서 몰라서, 옛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어 휘젓고 다니고 그로 인한 핍박과 연단을 맛보게 하심으로 고치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이고 불평 불만에 가득 찬 세상적인 형제에게 동조하고 그와 내통하여 넘어가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적이고 불평 불만 하는 사람과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누가 누구보다 우월하고, 누가 누구보다 못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보다 더 순종했다”, “더 기도했고 열심히 했다” 하는 등의 의로움이 남아 있으면 아직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라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침을 받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고 고침을 받는 면에서 같은 길을 가고 같은 연단과 같은 아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형제를 고치려고 주님께서 그 형제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드러내신 손길을 생각하고, 그런 형제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고, 나도 저렇게 행동할 개연성이 있다는 마음으로 조심하고, 그런 형제를 아픈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옛사람의 종 노릇 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은 흉악합니다. 그러나,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면 정말 아름다운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를 볼 때, 그와 내통하지는 않되 바로 그 십자가 이후의 형제를 생각하고 아직 보지 못하는 형제에 대해서 깨닫고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 6:]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짐을 지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믿고 저를 따라 나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 버리지 않고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2.3 잃은 자를 구원하러... (눅 19:10)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십니다. 말하자면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물론 모든 인류가 잃어 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힘든 삶을 살았고 세상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자로서 새 세상을 꿈꾸던 자의 모형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제대로 따라나서서 구원을 얻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으려면 이렇게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따르게 되면 그때부터 주님은 우리를 잃어버린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끝까지 예수를 따르고 도망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자가 되고, 그런 그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지만 또한 우리를 잃어버린 자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3. 맺음말
자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리고 사기 쳐서 얻은 구원을 사 배로 갚아서 온전한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는 잃어버린 자로 만들어서 구원하십니다. 주님께 온전히 고침을 받아 이 삭개오와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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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덕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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