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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삼손의 재조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9-07-04 13:44 조회 |7,774회

본문

삼손의 재 조명

[삿16:15-22]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8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들어가는 말

삼손이란 이름은 우리와 매우 친숙합니다. 이는 그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화 되기도 했고, 유년주일학교 때부터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손에 관한 이야기로는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밀밭을 불태워 버린 사건, 어린 사자를 손으로 찢어 죽인 사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일 천명을 죽인 사건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지금 말씀 드리고자 하는 기생 들릴라를 사랑한 마음 아픈 이야기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삼손에 관한 커다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지만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불순종하고 그로 인하여 비참한 인생을 마친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우리에게 본 받아야 할 사람이기보다는 본 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삼손은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따랐던 믿음의 선진이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여러분과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삼손에 관한 성경의 기록

 사사기는 13장에서 16장에 걸쳐서 나실인인 삼손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이란 '태양'이라는 뜻이며, 그는 이스라엘을 20년간 다스렸던 사사입니다. 삼손의 어머니 마노아는 무자(無子)하였으나,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삼손의 출생을 예고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장차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나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실인은 성별된 자로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으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택하여 성별된 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삼손은 원수인 블레셋의 마을 소렉 골짜기에서 기생 들릴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은 1천1백을 블레셋 방백들에게 약조 받고 삼손이 가진 힘의 비밀을 알아 내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르지 않는 푸른 칡으로 일곱 번 결박하면 된다, 또는 쓰지 않은 새 줄로 결박하면 된다, 또는 머리털 일곱 가닥으로 직조하여 묶으면 된다는 거짓말을 하며 이리저리 피하였습니다. 삼손이 자신의 힘의 비밀을 알려 주지 않자 들릴라는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어찌 나를 사랑하다 하느냐?'하며 그를 졸랐습니다. 삼손은 죽을 것 같은 번민에 빠졌습니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는데 만일 머리털이 밀리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비밀을 토로합니다. 이로 인하여 삼손은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잘 때 그녀는 사람들을 불러 머리털을 밀고 결박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두 눈을 뽑고 놋사슬로 묶어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 후 삼손의 머리카락은 점차 자랐고,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전에 모여  삼손을 잡은 기념으로 그가 재주부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삼손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이 내 눈을 뺀 것의 원수를 갚게 하소서' 기도하고 기둥을 밀어 신전을 무너뜨립니다. 그때 그곳에 있다가 깔려 죽은 블레셋 사람들의 수가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았습니다.

생각해 볼 점

 20년간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영웅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 결과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이것을 놓고 우리들은 '하나님이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명령을 어긴 사람이 맞아야 할 당연한 최후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 내용에서 '우리는 삼손과 같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자'는 교훈을 취합니다. 또는 여자는 요물이니까 멀리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패가 망신한다는 교훈 교재로 삼기도 합니다.
  삼손에 관한 이런 단순한 평가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의문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적어도 그것보다는 더 깊은 뜻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구태여 성경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런 교훈은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스포츠 신문에 잘 나가는 어떤 사람이 간음하다 고소 당해서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보도된다면, 우리 모두는 그 일로부터 좋은 교훈을 받을 것입니다. '절대 간음하지 말아야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인간 세상의 스포츠 신문은 우리에게 '간음 금지'의 교훈을 주는 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적어도 간음을 금지하는 교훈 보다 더 깊은 뜻을 전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둘째는 히브리서 기자가 삼손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기생과 동거하다가 신세를 망친 자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본 받아야 할 믿음의 선진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우리가 아는 삼손과 성경 히브리서 기자가 아는 삼손은 서로 다른 사람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삼손이 기생 들릴라와 동거했던 기록을 읽지 못한 것일까요? 아니면 삼손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본을 보였으니 믿음의 선진이라고 했을까요?
  성경이 삼손을 믿음의 선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평가가 어디에서인지 무엇인가가 잘못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두 번째 의문입니다.
  셋째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13:5)”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런 나실인 삼손이 타락할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 있다가 신전을 무너뜨릴 때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졌고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삼손을 타락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세 번째 의문입니다.

의로운 삼손

 삼손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기생에 빠져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들릴라와의 관계마저도 순종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떤 분들은 '그럼 하나님이 죄의 방조자란 말이냐?', '하나님이 기생과 놀아나라고 했다는 것이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삼손이 들릴라와 사랑에 빠지도록 하셨습니다.

- 딤나여인과의 결혼은 하나님의 뜻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사기 14장의 기록을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삼손은 블레셋의 딤나 여인을 아내로 삼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의 부모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원수(怨讐)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삼손은 그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이 경우 우리도 삼손의 부모와 같이 그가 율법을 어기고 이방 딤나 여인과 결혼한 것을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삿14:3-4] 3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은 삼손이 딤나여인과 결혼 하도록 함으로써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자 하셨습니다. 이후 사사기 14장, 15장의 기록을 보면 삼손은 그 여인과 결혼하고 7일간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결혼 잔치에 참여한 30명의 블레셋 친구들에게 잔치가 끝나기 전까지 맞추어야 한다며 수수께끼를 냅니다. 그들은 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7일에는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였고, 그녀는 삼손에게 울며 졸라 해답을 얻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블레셋 친구들에게 알려 주었고 결국 그들은 기간 내에 삼손에게 답을 말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맞춘 것을 안 삼손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 그의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손의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주어졌습니다. 후에 삼손이 자기 아내를 찾아 왔을 때 장인은 자기 딸을 내 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삼손은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곡식 밭을 불 태웠고,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진노하여 삼손의 장인과 그의 딸을 불사릅니다. 또 삼손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들을 크게 도륙합니다 (삿15:8).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지만 여기까지만 말씀 드립니다. 각자 해당 성경말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삼손의 딤나여인 결혼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국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으로 삼손이 딤나여인과 결혼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삼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기존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가 됩니다. 삼손이 이것을 몰랐을까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의 딤나여인과 결혼하고자 할 때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실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인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그 여인과 결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부모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율법에 따라서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삼손이 율법에 저촉되는 결혼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이해한다면, 삼손이 이방 딤나여인과 결혼한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존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율법의 참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른 것도 다른 것이려니와, 율법을 세우신 하나님이 그 결혼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그것을 계기로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였습니다.   

- 하나님이 허락한 들릴라와의 사랑

 나실인 삼손은 딤나여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들릴라 문제를 놓고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이방 여인이요, 기생인 들릴라와 관계를 갖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리고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추측이 아닌 것은 같은 경우인 딤나여인과의 결혼문제에서 삼손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서로 같은 패턴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딤나여인과의 결혼은 들릴라를 사랑한 사건의 예표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삼손이 사랑한 두 여인은 모두 블레셋 이방사람들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들과 결혼 하거나 사랑할 수 없다는 면에서 같습니다. 또한 삼손은 이 두 여인들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딤나여인이 조르자 수수께끼의 해답을 말해 주었듯이, 들릴라가 조르자 죽을 줄 알면서도 자신의 힘의 비밀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두 여인을 모두 다 사랑했다는 뜻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해서는 안될 비밀까지 말해 주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딤나여인과 결혼한 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게 됨과 같이, 들릴라를 사랑한 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가장 많은 블레셋 사람들 죽이게 됩니다.
  자, 이렇게 보면 '삼손이 딤나여인과 결혼한 것은 블레셋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들릴라와의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 것은 블레셋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았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삼손에게 어떤 죄도 없다는 의미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삼손이 기생 들릴라를 사랑한 죄에 대한 징계를 받아서 눈알이 패이고 맷돌을 돌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럼 그가 딤나여인을 사랑한 죄에 대한 징계는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없습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었고, 허락한 사랑에 대한 징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 진실한 삼손의 사랑

삼손은 들릴라를 어떻게 사랑했을까요? 그냥 기생 하나쯤 하며 가볍게 생각하고 즐기려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들릴라를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삼손은 힘의 비밀을 묻는 그녀에게 그것을 말하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비밀을 말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저리 피하며 시간을 끌고 또 끌었습니다. '마르지 않는 푸른 칡으로 일곱 번 결박하면 된다'고 하기도 했고, '쓰지 않은 새줄로 결박하면 된다'고도 했고, '머리털 일곱 가닥으로 직조하여 묶으면 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삼손이 이런 여러 가지 허황된 대답을 한 것은 그냥 심심풀이로 스무고개 퀴즈를 한 것이 아닙니다. 비밀을 말하면 자신이 죽겠고, 말하지 않으면 들릴라가 떠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고자 했습니다. 그녀를 놓고 싶지 않은 삼손의 고뇌에 찬 마음의 표출이었습니다.  
  들릴라는 '당신이 이렇게 놀리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음이라'며 삼손을 졸라댔습니다. 이때 삼손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삿16:16)"
  사랑하는 들릴라는 졸라대고 또 비밀을 말할 수는 없고, 삼손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그녀를 진정 사랑했고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비밀을 토로(吐露)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여 벌어지는 일을 보고는 '기생을 멀리 했어야지...' 하며 그의 불찰로 치부(置簿)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겪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살다 보면 사랑해서는 안될 여인을 죽도록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랑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삼손은 그런 사랑을 했습니다. 

- 삼손에 대한 징계 ?

삼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는 그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일생일대의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그녀의 유혹을 넉넉히 물리쳤더라면 참으로 존경 받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고, 본 받을 만한 믿음의 선진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삼손은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본 받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폄하(貶下)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삼손을 보게 되면 눈알이 파이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게 됩니다. 기생과 놀아 난 불순종에 대한 징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삼손이 불순종하여 징계를 받은 사람이라면 히브리서 기자가 그를 믿음의 선진으로 거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와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그렇다면 하나님은 삼손을 통하여 어떤 뜻을 이루고자 했을까요?
  하나님은 삼손이 들릴라와 사랑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고 그로 인하여 심한 고초를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 모든 일이 그에게 일어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백성들을 죽일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딤나여인과 결혼함으로써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이, 이번에는 들릴라와 사랑에 빠지게 함으로써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멸절 시킬 계획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삼손은 들릴라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눈이 파인 채 연자 맷돌을 돌렸습니다. 한 번은 많은 블레셋 방백들이 삼손을 잡은 기념으로 다곤신전(神殿)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고자 할 때, 그가 신전을 무너뜨림으로 생전에 죽인 사람의 숫자 보다 더 많은 원수를 죽였습니다. 삼손을 통해서 블레셋 사람을 물리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게 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그렇게 쓰신 것입니다.  
[삿16:30]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이 기사는 삼손을 택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비유입니다. 이방 블레셋이란 믿음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멸절 시킨다는 의미는 믿음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주변에서 여러 가지 죄의 요소들을 없애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이란 믿음의 방해 요소인 육신의 소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철저히 망하면 망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선진 - 삼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삼손을 쓰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계획은 삼손의 큰 고통과 죽음까지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삼손의 죽음은 기생 들릴라를 사랑하게 된 것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일하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실인이었고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들릴라를 사랑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시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생들과 일락(一樂)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욕정에 이끌려 그러는 것이고 그런 행동에는 심판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의 모형인 삼손의 경우는 그렇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무튼 삼손은 하나님의 뜻 아래 일련의 과정을 거쳐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삼손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임 받은 믿음의 선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내어 준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먼저 거듭난 자들을 보내어 악의 세력에 사로 잡힌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고 있는 악의 세력을 철저히 멸하면 멸할수록 그들의 구원은 가까워집니다. 이런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거듭난 자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삼손의 예가 그렇고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예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삼손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삿16:20-21]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삼손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기록에서 그 생각이 옳다고 재확인합니다. '보아라! 삼손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즉 그림자로서, 다가오는 실체의 윤곽을 어느 정도 분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가 죄가 없으셨듯이 삼손도 죄가 없었습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를 기록한 성경말씀은 이렇습니다.

[삿13:2-5]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이런 삼손의 출생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그리스도의 출생과 흡사합니다. 더욱이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은, 예수께서 죄악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분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최후에 다곤신전을 무너뜨림으로 악의 세력을 궤멸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과 그가 구축한 우상 신전을 무너뜨려 소멸시키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도 그분이 죄를 지어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은 죄 없이 고난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 우리는 역사 속의 예수는 좋은 분이고 사모할 분이고 존경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예수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상에 앉아서 2000년 전 예수를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삶 속에서 실제로 연단하시고 책망하시는 예수의 손길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십자가에 내어 주게 됩니다. 특히 예수는 말씀이고 이 말씀이 사람의 인격 속에 담겨 자신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이 자신을 책망하면 그 안에 있는 예수는 보지 못하고 육신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의견을 달리하고 그런 중에 목사님이 혹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를 '목사님이 내게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그래도 싸다 싸. 그 죄에 대한 대가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목사님의 말씀 안에 예수가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몰라 보고 핍박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사람으로 다가 온 예수를 몰라 보았듯이, 지금 우리도 자신에게 사람으로 다가 오는 예수를 몰라 봅니다. 역사 속 과거의 예수나, 혹은 구름 타고 오실 미래의 예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은 분명 우리가 예수는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성경의 기록은 정확합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삼손에게서 여호와가 떠났기 때문에, 그는 눈알이 빠지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많은 원수를 물리칠 수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 과연 하나님께서 외면하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삼손의 명예회복

 하나님은 삼손과 예수그리스도에게 동일한 원칙 아래서 역사(役事)하셨습니다. 즉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사랑하고 칭송하지만, 삼손을 칭송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이나 예수나 같은 구원자입니다. 예수는 이해하지만 삼손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도 삼손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삼손은 의인이요 믿음의 선진입니다. 기생 들릴라를 사랑했다는 윤리도덕적 잣대에 눈이 가려 삼손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과거를 이제 청산합시다.
  그리고 삼손의 명예를 회복시킵시다. 


"무릎치며 읽는 성경2 - 참예수" 에서...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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