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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아만 장군의 "내 생각에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9-07-24 11:49 조회 |8,192회

본문

 

나아만 장군의 "내 생각에는..."

왕하5:1-14]  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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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만은 아람의 장군입니다. 그는 큰 용사로서 자신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람 왕이 그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에게는 과거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범하였을 때 사로 잡아 온 한 계집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이스라엘로 가고자 아람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한편 편지를 전해 받은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며 우리가 어떻게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람 왕이 이러는 것은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키려 함이라며 당황해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왕에게 나아만 장군을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는 사람을 시켜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여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심히 노하여, '아니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안수를 하던지 해야 고쳐지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자신은 얼굴도 안 보이고 요단 강 물에 씻으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강물로 치자면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 강물이 더 나을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편한 심기로 되돌아 가려고 할 즈음에 종들이 나와서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선지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했어도 했을 것 아닙니까? 요단강 물에 씻으라는 그 명령을 듣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었고, 문둥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불치병인 문둥병을 고침 받는 것은 영적 문둥병자인 죄인이 죄 사함 받아 구원 받는 모습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도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순종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상징하는 것들

[왕하 5:1-3]  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결과적으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계집종의 말에 따라 행함으로 일생일대의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하찮은 계집종의 말도 소홀히 하지 않는 나아만 장군의 인품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계집종의 말은 항상 하찮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집종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집종의 말을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 모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성경의 사건들은 나름대로 영적 세상을 계시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 자체에 매일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상징하는 바를 보기에 힘써야 합니다. 물론 지금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도 영적 세상의 일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조성하신 사건입니다. 이제 이것들이 영적으로 상징하는 것들에 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문둥병자의 상징에 관해서 말씀 드립니다.
  문둥병자란 우리 자신, 즉 '나'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고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 비참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윤리나 도덕에 의한 선행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위로해 보기도 하지만, 고치지도 못하고 그렇게 노력만 하다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런 영적 문둥병자들의 한 대표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계집종의 상징에 관해서 말씀 드립니다.
  이스라엘은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등 다른 이방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복음의 본산지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을 침범했을 때 한 계집종을 잡아 갔다는 것은 우리가 복음의 본산지인 교회에 나갔을 때 그곳에서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어 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에 나가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을 듣고 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큰 확신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하찮은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이 지식이 '나'라는 존재의 집 안에서 계집종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동안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계집종의 말이 우리들의 집에서 힘을 얻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자신이 진정 영적 문둥병자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때이고 또는 율법적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때입니다. 이때가 되면 비로소 자신 안에서 계집종 취급을 받던 그 예수에 관한 지식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참 예수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나아만이 계집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로 내려 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누구일까요?
  나아만 장군은 이방 아람인이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이외의 국가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는 타 종교를 믿거나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십니다.

[마 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즉,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미 하나님이 아시고 계시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구하는 자들을 이방인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문제로 예수를 찾는 사람이 이방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믿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고 있지만 이방사람이고 예수 아닌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나아만은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 림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방 나라인 아람에도 신이 있었고, 그 아람 사람들은 림몬 신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18절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아람으로 돌아가면 림몬 신당에서 어쩔 수 없이 절을 하게 될 텐데 그것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람에 있는 나아만에게도 나름대로 자신을 구원해 주고 고쳐 줄 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에 오게 됩니다.   

  나아만이 아람에서 섬기고 있던 림몬 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아만의 마음 속에 형성된 자기식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나아만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 진 신(神)으로 흔히 말하는 바알 신 또는 우상 하나님입니다. 이런 우상 하나님은 문둥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 속에 예수에 의해서 참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되면 문둥병이 고침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만이 문둥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아직 영적 문둥병을 고침 받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그 병을 고칠 능력이 없는 우상 림몬 신을 섬겨 왔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에서 예수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10-20년 믿어도 문둥병이 고쳐지지 않았다면, 자신이 섬기는 신이 과연 참 예수인지 아니면 림몬 신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믿어 온 신이 림몬일 수 있다는 말에 성질 낼 일이 아닙니다 (눅 4:28-30). 림몬 신을 섬기던 나아만은 당대에 유일하게 문둥병을 고침 받았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여기 나아만은 자신이 문둥병자라는 철저한 인식과 림몬 신이 그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일개 계집종의 추천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엘리사 앞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의 영적 의미는 우리가 참 예수에 관해서 들었던 말을 무시하고 있다가, 다른 방법이 없이 죽게 되자 무시했던 말에 순종하여 참 말씀 앞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왕하5:9-10]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 장군이 오자 엘리사는 사람을 보내어 그의 몸을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면 깨끗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역사 속에서는 일어난 실제 일로써,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영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요단 강 물은 말씀을 뜻하고, 일곱 은 온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이 고침을 받는 사건은 죄인이 말씀의 물로 온전히 씻김을 받아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의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요 3:5)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으면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서술적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라" 가 아니고, "(고침을 받으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듣기에 황당합니다. 사랑하려고 해도 안 되는 판에 사랑하게 된다 라니...?  될 것 같지도 않고 쉽게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우습게 생각했던 것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왕하5:11-12]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나아만은 엘리사가 나와서 자신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기도해도 병이 나을까 말까 한데 내다 보지도 않고 허황된 말을 하고 있으니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되돌아 가고자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아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아람을 떠나 이스라엘까지 왔고 또한 엘리야의 집 앞에 까지 왔습니다. 오는 과정에서 올까 말까 하는 마음 속의 여러 가지 갈등도 있었지만 자신의 옳다 하는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엘리사가 내다 보지도 않고 안수하지도 않자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그곳을 떠납니다. 다행히 그는 종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버렸기 망정이지 그가 이때 그냥 돌아갔더라면 이스라엘의 엘리사 집 앞에까지 온 모든 걸음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 생각
 
  우리 각자에게는 이미 자신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교회 내에서의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나아만과 같이 도중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합과 같이 기껏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불순종하여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100% 신뢰하고 자신을 온전히 그 사람에게 맡겨야 가능합니다.  

  저의 간증을 말씀 드립니다. 한번은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이 생겨서 이 주일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혹시 골절이 되지 않았나 싶어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의사는 뼈에는 이상이 없고 뼈를 감싸고 있는 근육에 이상이 생겨서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의사가 아픈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의 없이 말하는 것 같아 못마땅했습니다. 아무튼 의사는 주사와 물리치료 이틀, 그리고 내복약 이틀 분을 처방 해 주었습니다.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집에 왔습니다. 약을 먹을까 생각했는데 의사가 무성의하게 상담한 것에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육이 늘어났다는데 약은 무슨 약이야?'
  그리고는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계속 이틀을 치료 받았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제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 갔습니다. 한 일주일에 걸쳐 물리치료도 받고 부황과 뜸도 뜨고 침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차도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혹시 혈압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원래 다니던 내과에 갔습니다. 두 곳에서 고생을 하고도 낫지 않았기 때문에 제 마음은 의사 앞에서 아주 겸손해져 있었습니다. 의사가 무엇을 말하던지 그대로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잘난 척하고 제 생각대로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녀도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과 의사도 역시 '테니스 엘보' 라고 진단을 내립니다. 이 의사는 주사나 물리치료 없이 내복약을 삼 일분 처방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사는 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약 복용만을 치료 수단으로 정한 것입니다. 저는 의사를 판단하지 않고 고분고분 순종하여 약을 먹고 잤습니다. 그런데 웬걸 단 한번 약을 먹었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니 거의 80%가 완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렇게 저의 아픈 것은 완전히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정형외과 의사의 처방 중에서 내복약을 제 생각으로 빼내어 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그 의사의 말에 순종을 했더라면 어렵지 않게 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옳다는 생각이 결국 저를 의사 위의 의사 노릇을 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제대로 고침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영혼의 문둥병을 고치러 말씀 앞에 와서,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참다운 죄인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들의 상태는 죄 사함 받은 의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자신들이 그 죄악 된 삶에서 지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뜨거운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문둥병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상징하는 바 교회 앞에 나와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만 가지 자기 생각을 내어 놓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우리교회의 말씀, 말씀 하는데, 그럼 다른 교회에는 말씀이 없다는 말이냐?"'
  "목사님의 행실이 왜 저래? 남의 모범이 되지는 못할망정..."
   "혹시 목사님이 잘못 설교하고 이단에 빠지면 안되니까 그것을 살펴 보아야 한다."
  "교인이 원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
  일단의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고침을 받고자 나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판단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러 저러한 이유로 목사님의 말씀을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서 듣습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좋은 목표를 말한다 할지라도, 결국 이들은 목사님 위의 목사님인 것이고, 말씀 위에 말씀으로서 군림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힘들여 교회 나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집에서 자신이 자신을 가르치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문둥병을 고침 받고자 기껏 엘리사 앞까지 나왔다가 자기 생각을 앞세워 뒤돌아가는 나아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 강물에 들어가지 않고, 자기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나아만들에게는 문둥병의 고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순종한 나아만

[왕하5:13-14]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돌아가려고 하자 종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더 어려운 일도 했을 것인데 요단 강 물에 씻으라는 말에 순종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극히 합당한 말입니다. 문둥병으로 평생 고생하다 죽을 사람인데 여기까지 와서 요단 강물에 몸을 씻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나아만은 여기서 현명한 판단을 하여 엘리사의 말대로 했고 그리하여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까지 왔고, 또 엘리사 앞에까지 와서 그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 강물에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리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나아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한 이런 순종의 행동이 힘이 들거나 또는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순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아만을 다음과 같이 크게 말씀하십니다.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사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아람)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하면 하나님을 믿는 나라이고 아람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문둥병을 고침 받게 된 사람은 아람 사람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은 분이 가득하여 예수를 산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눅 4:28-30).
  하나님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을 육신적으로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원하고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진정 알고 고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이방인이던 이스라엘인이던 상관없이 구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들은 그 병에서 놓이고자 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지친 나아만

 실로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침 받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본문 내용에서 그가 무슨 특별한 선행을 한 것도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모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혼자만 고침을 받게 된 것일까요? 그 비밀은 그가 아람에서 이스라엘로 오고, 이스라엘의 엘리사가 한 말에 순종한 그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순종하는 문둥병자는 이스라엘에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아만은 자신이 문둥병자로서의 삶에 철저히 절망하고 고침 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 계집종의 말이 들렸고 이스라엘까지 왔습니다. 그러다가도 "요단 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헛된(?) 말을 듣고 돌아가려 했지만 , 마음을 바꾸어 그대로 했습니다. 이 모든 순종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삶에 완전히 지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어느 순간에 포기하고 아람으로 되돌아 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고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얻는 것이 없어 포기하고 그물을 씻고 돌아가려고 할 때, "(베드로의 생각에는 고기가 절대로 있을 것 같지 않을)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눅 5:4)"는 예수의 헛된(?) 말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자신이 문둥병자로서 힘들고 어려운 삶에 지쳐서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순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는 '나'는 과연 인생에 있어서 지쳤는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자신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옳다 함을 내려 놓고 끝까지 견디면 과연 지친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쳤고 안 지쳤고 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일곱 번 씻는 과정

나아만은 동일한 요단 강물로 일곱 번 씻고 나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씻을 때 매번 다른 물로 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요단 강물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사랑, 헌신, 구제, 기도, 봉사, 금식, 전도, 헌금 등을 주제로 매 주일 달리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말씀은 외형상 다양하고 화려한 것 같지만 실상은 율법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모든 설교는 우리 안에 임하는 예수에 관한 한 가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임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구제, 헌신, 봉사, 기도, 금식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은 오직 한 가지, 우리 안에 임하는 예수를 증거합니다. 이 동일하고 반복적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변화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동일한 말씀을 듣고 변화되고 자라는 것은 마치 콩나물이 물을 받아서 자라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콩나물은 매일 같은 물을 받습니다. 또 한편 그 물은 매번 다릅니다. 다른 이유는 매번 물을 받을 때마다 콩나물이 그만큼 자랐기 때문입니다. 콩나물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 물을 받을 때하고 두 번째 물을 받을 때 각각 그 물의 의미가 다릅니다. 두 번째 물을 받은 콩나물은 첫 번째 물을 받을 때 보다 조금 자랐기 때문에 받은 그 물의 의미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물에 의해서 콩나물은 자라나게 됩니다. 말씀도 또한 그러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예수에 관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한 번 들을 때, 두 번 들을 때 다르고, 세 번 들을 때 또한 다릅니다. 말씀 자체로는 같지만 매 번 물의 작용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일곱 번을 다 씻기 전까지 나아만은 온전히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여섯 번째까지 씻음이 매번 무의미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매번 씻을 때마다 그는 조금씩 고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의인으로 거듭나는 과정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한 번 들음으로 고침을 받게 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번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을 채우기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실패하는 현대의 나아만들

만일 우리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죄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첫째, 아람에 나아만이라 하는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람에 있는 문둥병자 나아만은 예수 믿고 있는 우리 자신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람에 문둥병자로 있다는 것은 예수를 믿지만 아직 율법적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고, 아직 참 예수를 알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해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상태의 이방 죄인인 것을 의미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위치합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자신들은 구원 받았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조금 더 그런 삶을 살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계집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로 갑니다.
  이것은 죄인인 우리가 죄 사함 받게 해 준다는 참 예수의 말씀을 접하게 될 때가 옵니다. 이때는 기존에 우리가 믿고 알아 왔던 율법적 말씀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이 글이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계집종 역할을 할 것입니다.
  셋째, 나아만은 기껏 엘리사 앞까지 왔다가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서 순종하고 요단 강물에 일곱 번 씻고 문둥병을 고침 받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진 자 앞으로 나온 우리가 때로는 우습게 들리고 자신을 아프게 하는 말씀을 듣고도 끝까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 말씀의 물에 일곱 번 담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첫 번째 단계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또한 세 번째 단계에 와서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경우나 요단 강물에 일곱 번 씻을 때까지 견디지 못하면 병 고침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도중에 포기하는 모습이 다 안타깝지만 엘리사의 문 앞에 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는 것은 더 더욱 안타깝습니다. 기껏 긴 세월의 여정을 거쳐서 말씀 앞으로 나오고 고침을 받기 직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침 받는 과정을 보면 그 순간 순간 그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으며, 오직 처음에 시작할 때의 마음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정리하자면 나아만과 같이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죄인 된 삶에서 절망하고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내 생각에는...' 하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과정 중에서 자신의 생각이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순종을 하고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나아만을 고침 받게 한 믿음의 실체는 그의 지친 삶 자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의 어떤 노력이나, 행동,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오직 지친 삶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나아만과 같은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라고 해서 스스로 따라 나서는 사람들은 아직 제대로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시대에도 나아만처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 나아만 장군의 희귀성은 당대에도 그랬고, 예수 시대에도 그랬고, 현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이제 나아만 장군만큼 지치십시오. 그리고 지금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지친 것을 표현하고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그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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