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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붕 위에 있는 자와 밭에 있는 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9-07-31 17:46 조회 |5,904회

본문

[마24:15-21]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

1. 들어가는 말

[궁금한 말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종말장으로 알려진 이 장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성경구절 중에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말씀도 그리 흔치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말 때에는 지붕 위에 있거나 밭에 있거나 모든 것을 놓고 도망가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은 이런 말씀의 참 뜻을 안다며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선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 종말 때의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뜻이 무엇인지 말씀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앞으로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한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세상에 속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그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은 사람과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의 경우의 예를 들어, 바른 방향은 따라가고, 그릇된 방향에서는 돌이키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
우선 이 종말의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종말은 기존의 나의 죄악된 인생이 예수에 의해서 맞게 되는 종말을 말합니다. 옛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심판의 때이기 때문에 이전의 잘못된 것, 죄된 것, 더러운 것이 정결케 되는 일정 과정이며, 그래서 종말의 때에 사랑이 식고 영적으로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말의 때가 지나면 새하늘과 새땅이 우리 자신에게 임할 것이고 그때는 새로운 피조물로 이 세상을 살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에 의한 이런 자신의 옛사람의 종말이 지금 진행되지 않으면 예수 헛믿는 것이고, 교회에 헛다니는 것입니다.

[개요와 방향]
자, 본문 말씀은 예수에 의해서 심판이 진행될 때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붕위에 있는 자, 밭에 있는자 그리고 아이 밴자와 젖먹이는 자, 안식일과 겨울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의미들이 왜 종말과 연관이 있는지에 관해서 같이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지붕위에 있는 자와 밭에 있는 자의 의미에 관해서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2. 본문 내용

2.1  지붕 위에 있는 자 (마 24:17-18)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
종말의 때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어떤 것을 가지러 집으로 내려 가지 말라고 합니다.
종말의 때,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본 그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의 믿음생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참 예수를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서기 시작한 때입니다. 이때가 종말의 때이고, 이때 말씀이신 예수에 의해서 우리의 기존 가치관과 율법적 믿음과 행함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지붕 위에 있는 자가 집안으로 내려가면 화를 당합니다. 그래서 내려가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두 장소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붕 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집안입니다. 일단 지붕위와 집안은 그 위치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상징성은 지붕위가 높은 차원이고 집안은 그보다 낮은 차원입니다. 지붕위는 영적차원이고 집안은 육적차원의 위치입니다.

[마10: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도 어두운 곳과 광명한 곳, 귓속과 지붕 위를 대비시켜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말씀을 어두운 곳에서 듣습니다. 즉, 어두운 육적인 상태에서 듣고 깨닫고 조명을 받게 되면 광명한 곳에서 선포하게 됩니다.  귓속으로 듣는 것은 즉 육신을 통해서 듣고 그 말씀에 의해서 변화를 받게 되면 지붕 위에서  너희가 영적인 위치에서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이와같이 집 위는 영적인 위치를 상징합니다.

[행10:9-11]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지붕위는 기도하는 곳,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는 하늘이 열리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지붕위라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하고, 이런 사람들은 종말 때에 집안으로 무엇을 가지려고 내려가지 말라고 합니다. 온전히 지붕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직 집안인 세상에 미련이 있는 사람들이 종말의 때에 집안 물건을 챙기려고 지체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롯이 소돔성이 멸망할 때 그때 천사가 빨리 그 성을 나오라고 했지만, 집안에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서 지체했던 인물입니다. 그때 그가 관심을 두고 있던 집안의 것은 두 사위였습니다. 그들을 건지려고 지체하다가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기며 듣지 않았고 날이 새게 되자 두 천사가 아슬아슬하게 롯을 꺼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롯은 하나님을 믿으니 마땅히 지붕 위에 있는 자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막상 일이 생기자 집안으로 몸을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롯의 처는 종말의 때에 세상에 미련을 두고 그것에 미혹되어 도망가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자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롯의 처는 지붕위에 있다가 집안으로 물건을 가지러 내려간 사람입니다. 

[우리의 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있기에 명색이 지붕 위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막상 심판 때가 되고 마지막 때에 말씀에 의해셔 시험이 닥치게 되면 과연 자신이 지붕 위에 있는 자인지 집안에 있는 자인지 본색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으로부터 형제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형제를 통해서 자신을 고치려는 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으로 그 사람이 형제를 인정 못하는 교만함, 그것이 하나님의 지체로부터 분리되는 원인이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의 옛사람이 고쳐지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멘하고 순종하면 종말때 지붕위에 남아 있는 자입니다.
물론 말로는 형제를 낫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행동은 여전히 그 형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 형제를 보면 도망하고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고 여전히 자신의 옛사람의 인도함대로 움직인다면 집안에 물건(나 잘났다는 인식)을 가지러 내려 오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자신이 깊은 말씀을 아는 것으로 세상 재물을 삼고 있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아는 지식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가 무슨 뜻이다라고 알면 뭐합니까? 또는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가 무슨 뜻인지 알면 뭐합니까? 그것으로 선생 노릇이나 하려고 하지, 막상 그 알고 있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옛사람의 종노릇한다면, 종말의 때에 지붕에서 내려와 집안에 머물고 있어 심판을 자초하는 자입니다.

말씀은 그것에 순종하라는 것이지 자기 머리 속의 지식으로 가지고 있어 선생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자신이 지붕 위에 있어야 할 자라고 생각한다면, 말씀을 받았을 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지붕위에 머무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것은 반대로 집안으로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2.2 밭에 있는 자 (마 24:17-18)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밭과 전도자]
성경에서 밭이란 우리의 마음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밭에 있는 자는 우리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를 뿌리는 전도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란 꼭 말씀을 전하는 교역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도 또한 전도자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들은 말씀을 또 남들에게 전하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말씀을 듣지만 나가서는 들은 이 말씀을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자는 동시에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밭에 있는 자는 남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겉옷]
겉옷이란 "히마티온"이라고 해서 옷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옷은 성경에서 의로움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로 인한 복음의 의(義)냐 아니면 자기 행함으로 인한 율법의 의(義)냐에 따라서 긍정적 부정적인 면으로 다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지러 가지 말라는 말로 미루어, 문맥상 부정적인 의미에서 율법에 의한 의로움(옷)을 상징합니다.

[약 5:1-3]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좀이 먹는 옷은 바로 율법으로 인한 옷을 말하고 그것은 율법적 행함을 뜻합니다. 그들이 부자인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행한 사람들은 "나는 무엇을 했네" 하고 자랑하게 되며, 그 자랑거리가 그들의 재물입니다. 아무튼 이런 율법의 행함의 옷이 여기서 말하는 겉옷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 때에 즉 심판의 때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율법의 옷을 가지러 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말씀에 의해서 심판이 일어나는 때이라서 참다운 복음의 씨를 가지고 있는 자와 율법의 씨를 복음의 씨로 착각하여 가지고 있는 자가 구분이 됩니다. 따라서 이때 겉옷을 가지러 가는 자는 율법적으로 예수 믿고 있다는 뜻이고, 그동안 믿었던 믿음이 율법적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참다운 말씀을 받게 되면 지금 자신이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드러납니다. 그동안 자신이 씨를 뿌리는 자로 밭에 있던 자인데 참다운 말씀에 조명을 받고 보니, 바로 겉옷을 가지러 가는 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살펴 보고 있는 종말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지구종말로 생각하고 그때를 위해서 열심히 신앙생활한 그 자체가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밭에 있던 그가 겉옷을 가지러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심판이 자신이 죽기 전에 있기 때문에 회개하고 고침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면에서 심판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맏아들과 탕자]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을 봅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옵니다. 맏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씨를 뿌리고 있는 밭에 있는 자입니다.
 
[눅 15:25-26]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상징면에 있어서 맏아들과 탕자는 신자들로 씨를 뿌리는 자들입니다. 둘 다 밭에 있는 자인데, 맏아들은 종말의 때에 밭에 있다가 겉옷을 가지러 돌이키는 자입니다. 맏아들에게 종말의 심판의 때는 동생이 돌아 왔을 때입니다. 그동안 맏아들은 밭에 있는 자로서 씨를 뿌리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는 자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맏아들이 가지러 욌던 겉옷은 무엇이었을까요?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가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찾은 겉옷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하지 않은 의로움"이었습니다. 즉 "아버지 재산 축내지 않고 창기와 놀지 않은 의로움"- 이것이 그의 율법적 겉옷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이신 예수가 와서 지금 까지의 우리의 믿음이 율법적 믿음이었다고 정확히 지적하면,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겉옷을 가지러 집안으로 돌이킵니다.
"나는 예수를 언제부터 믿었고, 교회에 직분이 있고, 믿음의 선진들이 믿는 바대로 믿었고, 선교단체에서 특별훈련도 받았다." 뭐 이런 행위를 들고 나올 것입니다. 겉옷입니다.
아직 그런 행동이 나온다면 종말의 때에  산으로 도망할 자격에 미달된 자입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생활을 해야 다음번 도망 때는 제대로 휴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맺는 말

지붕 위에 있는 자와 밭에 있는 자가 종말 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인지 그  방향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심판과 종말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집안의 물건을 끌어 안고 시간만 보내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율법과 윤리도덕의 겉옷을 찾으러 뒤로 돌이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산으로 도망가야 할 것이고, 지붕 위에 있되 집안으로 내려 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밭에 있되 겉옷을 챙기러 돌이키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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