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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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10-10-09 04:11 조회 |8,616회본문
새벽기도
- 새벽기도 하라!
목회를 시작하기 전의 일입니다.
저는 원래 새벽잠이 무척 많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닌 이래로 새벽기도에 참석한 적도 없었고 행여 꿈에라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남자가 새벽기도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궁상맞은 짓 같이 보였습니다. 그 해 11월 주님을 만난 후로도 저의 이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새벽기도라는 특이한 예배는 성경에도 없고, 또 외국에도 그 예가 없습니다. 유독 한국에만 있는 새벽기도는 일부 극성스럽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간 제도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들이 새벽기도뿐만 아니라 철야예배, 0시 예배까지 만들어 관례화 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한심하고 미련해 보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힘든 시간대만 골라 자학(自虐)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주의 종들은 새벽기도, 철야예배, 0시 예배를 드리지 않고도 크게 쓰임 받는 것을 보아도 꼭 힘든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은 저에게 새벽기도에 관한 어떤 말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지 1년 남짓 되던 1993년의 어느 날, 아침에 세수하러 화장실에 들어가서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새벽기도 나가라!'
이 말씀은 제가 새벽기도의 유용성 또는 무용성에 관한 생각을 하던 중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는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내려앉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이 생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관해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사단이 준 마음일까도 생각을 해 보았지만, 솔선해서 새벽기도 하라고 하는 멍청한 사단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새벽기도 하라는 마음은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었지만, 주님이 저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에 대한 기쁨에 취해 다음 날부터 집 근처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5시에 예배가 시작되니 4시 20분에 일어나 대충 세수하고 나갔습니다.
- 힘든 새벽기도
그러나 새벽기도 나간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고 쉬지 않았습니다. 하루 새벽기도 나가면 그날의 생활리듬이 깨져서 온 종일 몽롱한 상태에서 회사 일을 해야 되었고, 만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힘든 환경 속에서 새벽기도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새벽기도는 무거운 짐이 되었고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새벽기도 하라는 것이 목사님 말이었거나, 다른 어떤 사람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었더라면 벌써 중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주님의 명령이니 섣불리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 저의 딱한 입장이었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억지로 새벽기도에 끌려 나가다가 그때 어떤 책을 몇 권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기존 기독교인들의 위선적인 믿음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 헌금, 봉사,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면 뭐 하는가 그것을 한다 해도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요지의 글들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그 사람의 글에 매료되었었고, 그때 이후로 과연 새벽기도를 주님이 원하실까 하는 문제로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힘든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시 누웠다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제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30)"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4)"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1:9)"
이 세 구절이 서로 어우러지며 바로 지금의 기독교가 저에게 새벽기도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옛날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 새벽기도 졸업(?)
이 깨우침이 너무 기쁜 나머지 저는 무릎을 탁 치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주님은 내가 힘들게 새벽기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 !'
새벽기도뿐만이 아니라 '주일성수', '헌금', '금식' 등이 모두 주님의 뜻과는 달리 목회자들의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교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새벽기도에 나가지 않았고 새벽기도 해야 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는 것을 본 한 친구는 자신도 새벽기도 괜히 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며 갈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완전히 끊을 수가 없어서, 회사 나가기 전 집에서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나서 40분에서 한 시간 정도씩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렇게 집에서 반쯤 깬 상태에서 기도를 하니까 날이 갈수록 기도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피곤한 날은 그냥 누워 자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는 교회에서 30분 하는 것이 집에서 한 시간 이상 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렇게 새벽기도에 나가는 것을 그쳤습니다. 그런 중에 한번은 주위를 둘러보니 저보다 늦게 주님을 만난 사람이 남에게 방언을 할 수 있게 하는 은사도 받는 등 여러모로 저보다 빠른 영적 성장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몹시 불안했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저에게 영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시던 분과 상의를 했습니다. 그분은 기도를 하시고 나서 하는 말씀이 자신이 주님께 '이 분에게 새벽기도를 권할까요?' 했더니 주님은 '그 애는 말해도 안 들어!'하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말에 마음이 심히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영적으로 막혔던 원인은 새벽기도를 중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새벽기도 다시 시작
집에 돌아와서 주님께 회개하고 내일부터 다시 새벽기도에 나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친지 얼마 안 되어서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동생은 그냥 전화를 한 것이었지만 새벽기도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어떤 부부가 있는데 남자가 여자 따라 새벽기도 하루 이틀 따라가 보더니 평생 새벽기도에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라고 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동생의 말 속에 주님의 뜻이 들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새벽기도를 할 생각이면 평생 동안 하라는 말씀이신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끔찍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전혀 없었기에 주님께 잘 인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원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하필 그때 전화해서 평생 새벽기도 운운한 동생이 몹시 야속했습니다. 불러 놓고 '왜 쓸데없이 그 따위 전화를 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다 주님의 계획하심이라는 것은 기본입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기도를 재개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니 주님은 두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 (고전9: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6)"
제가 주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을 야고보서 말씀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함을 고린도전서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양치질 중에 새벽기도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받았지만 실천에 옮기는 중에 점차 힘이 들어 마음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둘 구실을 찾았고 때마침 새벽기도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을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원하던 말씀과 논리이니 그것이 커다란 은혜(?)의 말씀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아무튼 중단한 새벽기도를 다시 나가며 3일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원망
그렇게 얼마를 다녀도 새벽기도가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은사나 주시면 그것으로 힘을 얻어 새벽기도에 잘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뭐 이렇다 할 어떤 은사를 주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한번은 새벽기도 갔다 오면서 제 신세가 무척 처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고 평생 동안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왜 하필 나라는 말인가? 재수 없이 내가 악한 신(?)에 잘못 걸렸구나!'
이런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새벽기도 하지 않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 아닌데 왜 이 신(神)은 유독 나만 붙잡고 이런 고난을 주는지 정말 야속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만든 과잉 충성 분자들이 한없이 얄미웠고 속으로 그들에게 심하게 욕을 해댔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며, 또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고생을 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순간 '이러면 안 되지 ......' 하면서 망령된 생각을 몰아내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이 다 나 잘되라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새벽기도 갔다 집에 와서 출근하기 전 잠시 잠이 들었고, 이때 하나님은 꿈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경고
꿈에 제가 운전을 하는데 사거리에서 좌회전 금지표시가 되어 있는 곳에서 유턴을 하고자 했습니다. 유턴금지 표시가 없어서 이곳이 유턴이 가능한지 아니면 금지되어 있는지를 잘 몰라 긴가 민가 하면서 유턴을 했습니다. 유턴을 하다 보니 직진하는 차들이 제 차를 힘들게 비켜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통경찰이 저쪽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다가 지나가는 다른 차를 얻어 타고 2-300미터 정도 따라 와 제 차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통경찰에게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지금 봐 주면 네가 앞으로 내게 부탁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 그때 나도 봐 주겠다'는 식으로 열심히 변명과 회유를 했습니다. 경찰은 결국 그냥 보내 주었지만, 그것은 제 회유에 넘어 갔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경찰이 제 차로 다가 올 때 이미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꼭 딱지를 떼려고 불러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경찰은 앞으로 조심하라고 하며 저를 그냥 보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깼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날 아침에 마음속에 품었던 불경(不敬)한 생각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재차 주님은 히브리서 12장 말씀으로 저를 깨우치셨습니다.
[히12/16-17]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주님께서 저에게 큰 소망을 주셨는데 주님이 기뻐하시는 새벽기도를 져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망령된 생각이 저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에도 혹시 늦잠이 들어서 가지 못하게 되면 주님께 혼날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간혹 무엇을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주님의 매서운 손길이 무척 두려웠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혹독하고 힘들게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이 간증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새벽기도를 하라, 또는 안 해도 된다는 권면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가 만난 주님이 새벽기도 문제를 가지고 저를 이렇게 훈련시키고 연단 시켰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이런 과정을 겪고 있는 분들은 자기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 따르다 보면 여러 가지 힘든 훈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에 말씀드리는 자기부인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정덕영
목사
자유교회
www.jayu.or.kr
"무릎치며 읽는 성경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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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영님의 댓글
정덕영 작성일
참고로 책에서 발췌하여 여기에 올리는 글들은
책의 원래 순서에 따라, 전체적인 흐름에서 읽을 때
더 크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