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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상존(常存)하는 십일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3-18 23:37 조회 |4,112회

본문

이 내용은 윤문과정을 거쳐 '무릎치며 읽는 성경3'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사실 십일조 자체에는 매우 어려운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말씀과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그만한 영적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잘못된 이론들이 교회 밖에 많이 있기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당분간 여기에 올립니다.

샬롬

정 덕 영
목사

------------------------

상존(常存)하는 십일조 1

[히 7:1-7]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

  두 가지 십일조

  교회 내에서 십일조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의 크기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믿음이 좋은 교인이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직 더 자라야 할 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당한 금액에 해당되는 소득의 십일조를 헌금으로 드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은 하나님을 체험하거나, 아니면 진정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십일조 하는 교인의 믿음이 좋다고 평하는 것은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소득의 1/10 헌금을 말합니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 위해서 특별히 율법에 명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명하신 물질 헌금입니다만, 이 십일조에는 영적인 의미가 따로 있습니다.
  이제 이 십일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상존하는 십일조1-두 가지의 십일조
  2) 상존하는 십일조2 - 율법의 십일조는 폐하여졌는가?
 
     본문은 제사장에 관한 말씀인데 십일조는 제사장과 연관하여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십일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의해서 레위지파 제사장에게 드리는 십일조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 떡과 포도주를 받고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리는 십일조가 그것입니다.

  앞으로 편의상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받는 십일조는 율법에 의해서 정해진 특성을 따라서 '율법의 십일조', 그리고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서 받은 십일조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드린 것임을 고려하여 '아브라함의 십일조'라고 부르겠습니다.

율법의 십일조

[히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율법의 십일조에 관해서 말합니다. 이 십일조는 율법에 의해 백성들이 레위 족속과 그 제사장들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민수기 20장에서 보겠습니다.

[민 20:21-22]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에게는 별도의 기업이 주어지지 않았고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나머지 11지파가 각자 소산의 십 분의 일을 레위인들에 주어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민수기 이외에도 성경에서 다양한 형태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레위인과 그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의 십일조(레 27:30-32)", "하나님이 거할 곳에서 나눠 먹는 십일조(신 12:5-9, 신 14:22-23)",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먹는 십일조(신 14:28-29, 신 26:12-13)" 등 입니다.

  이런 율법 아래서의 모든 십일조를 총칭하여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 제사장들이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취하는 명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7:5). 유대인들도 성경의 여러 가지 십일조를 일괄적으로 소득의 십일조로 이해했습니다(눅 18:12). 따라서 율법의 십일조는 이론의 여지없이 '레위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백성들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에 의해 레위 제사장들에게 드린 십일조입니다.
  이 율법의 십일조는 '물질 십일조'입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히 7:1-4]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십일조 이외에 또 다른 십일조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입니다. 이 십일조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린 것입니다. 율법의 십일조보다 앞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14장 1-20절의 내용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조카 롯이 대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출하고 빼앗겼던 재물을 찾아 가지고 돌아옵니다. 이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람을 축복하였고 아브람은 그 얻은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주는 장면의 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이 십일조를 우리로부터 받기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임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떡과 포도주를 받은 아브라함은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아브라함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하여 그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안에 이루어지게 되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제물인 십일조로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오직 우리 안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의 영적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몸을 십일조로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의 상징성은 사단에게 빼앗겼던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떡과 포도주)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역사 속의 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지금까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영적 십일조입니다.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곧바로 실체, 즉 영적 십일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그 사람 자신의 구원이자, 거듭남입니다.
  아브리함의 십일조는 거듭난 자신의 존재를 십일조로 드리는 '영적 십일조'입니다.
 
율법 십일조의 영적 의미

  하나님은 율법의 십일조를 통하여 레위 제사장들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의 십일조를 단순하게 레위 자손의 봉사를 갚는 의미로만 제정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세상을 말씀하시고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율법의 십일조는 그 안에 실체의 세상에 관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십일조가 지시하는 영적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십일조'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거듭난 자신을 '영적 십일조'로 드리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제사장들에게 '물질 십일조'로 드리는 것은 똑같은 구도입니다. 이 두 가지 십일조가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실체는 공히 "말씀에 의해 거듭난 자신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십일조는 실체 면에서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십일조를 제정하실 때 레위 제사장들에 대한 갚음은 부차적인 것이고 백성들이 이 실체를 보기 원하셨습니다. 즉, 백성들이 레위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마다 "내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 나 자신을 십일조로 드려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0장 3절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율법에 의한 한 제사입니다. 그것을 드릴 때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 앞으로 죄사함을 받아 우리 자신을 십일조로 드리기를 소망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모든 율법이 정한 것들의 역할이자 의미입니다.

  율법에서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먹는 십일조, 고아와 과부와 함께 먹는 십일조"가 있는데 이것들은 실체 면에 있어서 세상 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 영적 양식됨'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거듭난 자신은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려지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영의 양식인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고. 말씀에 주린 영적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어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합니다.
  '율법의 십일조'가 지시하는 실체는 '아브라함의 십일조'입니다.

말라기서의 제사장들

  지금까지 살펴 본 십일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말라기서에 언급된십일조와 제사장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 3:7-9]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성경 말씀은 율법적 의미와 영적 의미가 중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틀리고 하나는 맞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합당한 의미입니다.
  본문 말씀의 율법적인 의미는 누구나 다 아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부어 주십니다.

  하지만 이 율법의 십일조의 영적 의미에 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영적의미가 드러난다고 해서 물질 십일조의 의미가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십일조 안에 반영되어 완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영적 십일조로 드리는 사람은 물질 십일조를 여전히 드리되 이전처럼 율법을 준수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규례를 떠나고 지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 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갈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을 어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애초에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제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책망을 위한 책망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규례는 하나님의 법이고 결국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규례를 온전히 지킬 수 있으려면 그 규례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규례의 제정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자가 됩니다.

  결국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제사장들이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되기 위해서 돌아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계명을 준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겠습니까?"
  이에 하나님은 답하십니다.
  "도둑질한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물질의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로 돌아 가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아직 어린 자들에게는 그런 의미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씀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영적 의미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참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과 하나 된 자들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때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요, 산 제물입니다.

▶ 율법 제사장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책망하는 제사장들은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칠 수 밖에 없습니다. 실로 그들은 율법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의 구분 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사장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은 제사장들을 따르기는 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해야 할 백성의 마음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로채 자신들에게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나의 것(백성들)을 도둑질했느냐?"
  그런데 딱하게도 제사장들은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나이까? 물건 훔친 것도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을 외우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을 뿐인데요?"
 
  당시 제사장들의 입에서 생명의 복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율법의 교훈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을 올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없고, 그들을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운명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로 말하면 교인들에게 항상 예배 참석하게 하고, 성경공부, 세미나, 수련회 등에서 교육시키고 매사에 예수만 생각하고 열심히 믿으라고 상담해 주는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뭔가가 잘못 되었습니다. 잘 되었다면 왜 예수 믿어도 그렇게 만족이 없고, 허전하기만 한 것일까요? 죄사함 받았는데 왜 죄는 또 그렇게 짓는 것일까요? 제대로 돌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현재의 제사장들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지를 못합니다. 제사장이 모르니까 당연히 교인들은 더욱 더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하나님께 향해야 할 교인들의 마음을 도둑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들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율법의 십일조는 받지만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받고/드리지 못하는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복음의 제사장들로 거듭나기를 원하십니다.

▶ 복음 제사장

  만일 율법 제사장들이 제대로 된 복음을 받아서 복음 제사장들로 거듭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이제 그들은 백성들을 복음에 의해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을 하나님께 영적 십일조로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으로써 너희가 나에게 돌아 올 수 있다."
    이런 제사장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인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복음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온전한 십일조와 제물로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십일조의 축복

  이렇게 되면 제사장들이나 백성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게게 그 구원? 하나님의 나라? 그것 나 이미 받았는데... 다른 더 좋은 것 주지... "
  다른 더 좋은 것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말3:10-12]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인다는 것은 참다운 말씀에 의해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 십일조 양식으로 추수되고, 영적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이미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 요한 등은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늘 창고에 영적 십일조로 들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 창고에 들이게 된 자들은 백성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 양식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십일조가 이웃과 함께 먹고 나눌 양식으로 언급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영적 십일조가 말씀의 양식이 되는 것을 예표합니다.
       하나님께서 참다운 영의 양식(영적 십일조)으로 백성들을 먹이시고, 그로 인하여 백성들도 십일조로 받기를 원하시는데 하늘 창고가 빈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율법 제사장들이 온전한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십니다.

     황충을 금하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신다는 뜻은 율법 제사장들이 아무리 말씀의 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었습니다. 거듭남, 하나님의 나라, 구원과 믿음, 영생을 선포했지만 그 말씀의 열매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황충을 보낸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를 믿어도 인생이 고달팠고 힘이 들었고 허전하고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복음 제사장으로 거듭났으니, 하나님은 더 이상 황충을 우리 인생에 보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또한 포도나무의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복음 제사장입니다. 그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가 말씀으로 가꾸는 인생의 포도나무들이 기한 전에 열매를 떨어 트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온전히 거듭나서 하나님의 창고에 수확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됨으로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복되다 할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어 거듭난 자들의 아름다운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라기는 제사장에게 주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과 말씀을 받는 백성은 하나입니다. 또한 제사장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받은 말씀과 생명을 어차피 딴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는 백성이지만 돌아서서 그것을 남에게 말하는 순간 자신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라기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 십일조를 드리는 우리는 영적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율법 제사장에서 복음 제사장으로, 말라기시대의 제사장으로부터 바울 제사장으로, 레위 제사장 계열에서 멜기세덱의 제사장 계열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맺는 말

  율법의 십일조와 아브라함의 십일조, 이 두 가지가 드려지는 구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명 드리는 자 받는 자 그림자 실체
율법-물질 백성 레위 물질 거듭난 자신
아브라함-영적 아브라함 멜기세덱 노략물 거듭난 자신

  십일조는 율법의 물질 십일조로 먼저 시작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브라함의 영적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율법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일반 백성으로서 물질을 율법 제사장들에게 주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믿음의 사람로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드리게 되면 그 사람 안에서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의 의미가 완전하게 됩니다.

  이어서 "상존하는 십일조 2- 율법의 십일조는 폐하여졌는가?" 라는 문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상존(常存)하는 십일조 2

[히 10:8-9]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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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십일조는 폐하여졌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여 졌던 율법의 십일조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니까, 아니면 지금은 예수가 와서 율법의 제사제도가 폐하여졌으니까 해당사항이 없는 것일까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율법의 십일조가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

    "율법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에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무효(無效)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예수가 왔으니 율법시대가 이미 끝났다며 십일조의 폐기를 주장합니다. 한술 더 떠서 만일 십일조를 한다면 아직 자신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생각들이 옳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이 있습니다. 십일조, 성막, 제사, 제사장, 할례, 구제, 금식, 기도, 살인하지 말 것, 돼지고기를 먹지 말 것, 안식일 성수 등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율법의 행함을 통하여 다가 올 실체에 관한 계시를 가졌습니다. 율법에서 정한 이 모든 것들은 그림자로서 한결같이 실체인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율법들은 역사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예수 믿는 우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시대적으로, 환경적으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 중에서 제사제도에서 성막은 교회로, 제사는 예배와 교회생활로, 제사장은 목회자로 발전 계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대와 환경에 합당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십일조를 비롯하여 지금 교회에서 가지고 지키고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오심으로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오히려 추가된 율법들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어라", "비판하지 말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등이 그 율법들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오심에 따라 율법이 재편되기는 했지만,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이 폐하여 진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 있는 율법이 아예 폐기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이 물질 세상이 있는 한, 없어지지 않고 항상 있습니다.
  율법의 폐함은 한 사람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할 때, 그때 완전하게 됩니다(마 5:17).
  따라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도 아직 자신의 내면에 예수가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과정의 전단계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충분히 때가 찬 사람에게만 예수님이 비로소 오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를 전하는 교회에서 율법을 폐하여 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를 알 수도 없고 예수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성막과 제사제도를 통하여 오실 메시아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율법적 제도를 통하여 내면에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내면에 그리스도가 임해야 할 것을 소망하게 하는 그림자로서 있어야 하고, 특히 성막의 실체인 교회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을 갚기 위해서도 그러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오셨다고 율법이나 십일조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폐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 여전한 제사제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에 의해서 구약의 제사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사장들도, 그들에게 주는 십일조도 없어졌다."
  과연 그럴까요?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했습니다. 제사제도는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이루는 길에 해당됩니다. 기실 다른 모든 율법 조항들은 모두 이 제사제도에 포함되는 내용들입니다.

  이 제사제도는 성막이 성전으로,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로 점진적으로 발전 계시되었고, 그에 따른 제사의 형식 또한 변하였습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는 성막에서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제사제도는 지금 우리에게 교회생활로 발전 계시되어 있습니다. 제사제도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합니다.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일시적 죄사함을 받았듯이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예수에 의한 영원한 죄사함을 받습니다. 따라서 과거 제사제도는 현재 우리의 교회생활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과거의 제사제도가 지금의 교회생활과 어떻게 일치하는지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 교회는 성막
   교회는 과거의 성막에 해당됩니다.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셨듯이, 영이신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과 접촉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성막(회막)은 지금 우리의 교회에 해당됩니다.
단, 지금의 교회 중에서도 율법적인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가 참 빛으로 계신 복음적인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예배와 교회생활은 제사
  교회에서의 예배와 교회생활은 과거 성막에서의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서 제사장의 인도 아래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즉 죄사함의 제사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예배와 교회생활을 하면서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거듭난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산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구약의 제사는 지금의 교회에서의 예배와 교회생활의 모형입니다.
     
▶ 목회자는 제사장
  교회의 목회자는 성막의 제사장입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가져오는 제물을 받아 그것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취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로서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사함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이 예수는 지금 교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이 일을 목회자들과 함께 감당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지금 교회의 목회자들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신약에 들어와 제사제도가 폐하여졌고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도 사라졌다고 합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거듭나게 하여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자신이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성막 제사는 폐하여지거나 변경될지 몰라도 실체로서의 제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있고 제사장도 또한 그러합니다.

  사도바울은 목회자인 자신을 제사장으로, 육에 속한 이방인을 죄사함 받게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제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세우고 사역하였던 교회는 성막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은 만인 제사장설(벧전 2:9)을 들고 나와서 자신도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영적 의미에 있어서 제사장이란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자동적으로 교회의 한 지체로서 각자 받은 은사에 따라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교회의 참다운 지체로서 영혼구원과 이웃사랑의 일에 자연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나도 제사장 계급"이라며 자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교회의 목회자들입니다. 단, 교회의 목회자들 중에도 말라기서의 제사장들 같은 율법의 목회자들이 있고 바울과 같은 복음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신약에도 여전히 성막, 제사, 제사장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는 당시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봉사에 대한 갚음과, 자신을 십일조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합니다.

셋째 : 예수께서 오심으로 폐하여 진 것

  "율법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에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무효(無效)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예수가 왔으니 율법시대가 이미 끝났다며 십일조의 폐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폐하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가 왔기 때문에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말이나,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진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첫 것은 율법이 정한 바를 말하는 것이고, 둘째 것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첫 것을 폐한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를 완전히 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그럴 것 같으면 예수가 오심으로 폐하게 되는 것이 왜 십일조뿐이겠습니까? 율법이 정한 모든 것이 폐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율법이 정하고 있는 성막이나 성전, 제사나 제물, 제사장,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지금 여기 나오는 십일조, 헌물 등 이 모두가 다 없어져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물질 세상과의 접촉점이 없이 관념 속으로만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우리 자신이 십일조이고, 성전이고, 기도이고, 예배라는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당연히 이들은 믿음과 관련하여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이 거룩한 성전인데 뭐 하러 교회는 나옵니까? 예배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예배이고 자신이 거룩한 산 제사인데 그런 일을 별도로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천국, 믿음, 금식, 기도, 헌신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식의 율법 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은 인생, 집에 혼자 누워서 관념 속으로만 하나님의 나라에 왔다 갔다 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실체가 오면 그림자가 사라지거나 폐하여 진다는 것은 이런 허황된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전도지 '처음사랑'과 도서 '무릎치며 읽는 성경'을 읽고 교회에 전화를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이 교회에서 선포하는 말씀이 깊고 심오하다며 진심으로 칭송했습니다. 대화 도중에 교회에서 금요철야와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성경 말씀을 이렇게 깊이 이해하고 핵심을 파악하는 교회가 금요철야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길게 합니까? 기도는 존재로 하는 것인데...."
  전화를 받았던 집사님이 이 분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기도, 예배, 헌금, 봉사 이런 것들은 교회가 있는 한 폐하지 않고 항상 있는 아닌가요? 그럼 형제님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

  이 분은 초신자들을 위해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세운 원칙에 입각하여 일관되게 행한다면 주일예배도 폐하여야 합니다. 주일예배 때만 자신이 '예배'의 존재가 아닌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신자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당연히 예배, 기도, 금식, 십일조, 금요 철야가 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 남의 교회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될까요?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이 스스로의 지식으로 성경을 읽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폐하여졌다는 의미는 우리의 외부에 있는 율법 자체의 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내면에 임함으로써 내가 이전에 율법을 보던 '죽은 자의 시각'이 폐하여 졌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교회 예배라는 것도 이전에는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할 행동으로 보았던 시각이 폐하여지고, 자신이 예배 자체인 상태에서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교회 예배에 기쁨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예배는 이때나 저때나 있습니다만, 그 예배를 보는 이전 시각이 폐하여 진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폐하여 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폐기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였을 때 그것들을 바라보는 이전의 율법적 시각이 폐하여 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폐(廢)함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일인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내면에 오면 십일조를 보는 이전의 율법적 시각이 폐하여지고, 사랑의 시각으로 십일조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십일조는 그때나 이때나 항상 있습니다.

넷째 : 복음 아래의 십일조

  예수께서 자신의 내면에 임한 사람들은 그동안 율법 십일조를 드리다가 영적 십일조를 드리는 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십일조의 변역(變易)이 일어난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명실공히 복음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자에게도 율법에서 정한 십일조는 그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는 목회자들의 봉사에 갚음의 역할을 하고, 또 둘째는 자신을 십일조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에게는 십일조의 둘째 목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이제 십일조를 드림으로 율법 아래 있는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사실 거듭남이란 우리 자신의 거듭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이웃의 거듭남까지 이루어야 완성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거듭남은 이웃의 거듭남과 하나로 묶이게 되며, 이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지금 우리의 거듭남은 이후 남을 거듭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는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하는 물질 십일조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런 우리에게 율법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9:20-21]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거듭난 자들의 참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애초에 십일조가 폐하여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십일조의 폐기를 운운할 여지가 없습니다.
▶ 예수님이 언급한 십일조

  십일조 논쟁이 있을 때 마다 등장하게 되는 성구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이 말씀입니다.

[마 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의 인 신을 말하고, 저것은 물질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예수님도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 뜻은 의 인 신의 영적 십일조 안에서 물질 십일조가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의 인 신의 의미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십일조가 지시하는 실체인 아브라함의 십일조-영적 십일조-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의(義), 인(仁), 신(信)으로 말씀하십니다. 의, 인, 신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될까요?
 
의(義)는 예수께서 '나' 자신에게 임하여 '나'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심판하십니다. 이 의(義)는 '심판(Judgement)'이고 헬라어로 '크리시스 krisis'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인(仁)은 심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에 의해서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인(仁)은 '긍휼(Mercy)'이고 헬라어로 '엘레오스 eleos'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신(信)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다시 산 자들이 영원한 예수의 믿음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신(信)은 '믿음 (Faith)'이고 헬라어로 '피스티스 pistis'입니다. 새 생명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예수의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의, 인, 신은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그 분에 의해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거듭나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거듭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로써 아브라함의 십일조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십일조를 하면서 자신들이 물질을 드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것의 영적 의미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오직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했다는 자기 의로움만 쌓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십일조에서 찾아 내는 하루살이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한 영적 의미인 아브라힘의 십일조, 즉 약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여기서 의 인 신은 복음을,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라고 하신 말씀은 "이것-의, 인, 신도 하고, 별도로 저것-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둘, 즉 율법과 복음, 은 우리 한 사람의 내면의 세상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복음) 아니면 저것(율법)입니다.

하지만 오직 이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저것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행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말씀으로 거듭난 것을 말하고 이때 이 사람 안에서 저것도 함께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자신이 거듭나서 영적 십일조로 드리면 율법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기 때문에, 이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는 말씀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복음이 옴으로 그 복음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이 말씀은 자신의 내면에 신약시대가 임했는데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아브라함의 십일조, 즉 영적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이들은 십일조를 율법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합니다. 이것이 영적 십일조(복음) 안에서 율법 십일조가 완성된 모습입니다.

  십일조는 폐하여졌는가라는 말씀을 정리합니다. 교회 내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당연히 십일조를 드려야 하고, 교회 내에서 복음에 속한 자들은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십일조를 합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교회에서 상존합니다.

맺는 말

  계란 중에서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습니다. 무정란은 아무리 어미 닭이 아무리 품고 있어도 부화가 되지 않습니다. 무정란은 사람들과 다른 동물들의 먹이로 주어지게 됩니다. 반면 유정란은 그 안에 씨가 있어서 어미 닭이 품으면 부화되어 병아리가 됩니다. 그 병아리가 닭으로 성장하면 그로 인하여 더 많은 계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심는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득의 10분의 1은 유정란에 해당됩니다. 이것을 심어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폐하는 것은 유정란을 먹어 버려 더 이상 닭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막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하여 자신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을 물론 남들도 하지 못하게 열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은 지나간 과거의 어떤 법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서 정해진 십일조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거듭나서 복음에 속한 사람은 십일조의 존폐 여부 자체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사랑과 기쁨으로 드리게 됩니다.

  십일조는 과거나 현재나, 율법에서나 복음에서나 상존(常存)합니다. 이 십일조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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