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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탕자의 비유 (1/3) -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5-25 13:34 조회 |5,933회

본문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한 사람이 참다운 회개를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제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를 같이 보시겠습니다.

[눅 15:11-32]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비유는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모두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내용입니다. 화가 렘브란트는 이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탕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기회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허물 많은 둘째를 기뻐 받아들이는 감동적인 부성애(父性愛)를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버지의 용서와 한없는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의 말씀에 잘 순종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사람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순히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 주는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심오한 인생의 진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돌이키는 둘째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회개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며, 둘째와 맏아들과의 대비를 통해서는 은혜와 율법의 차이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줍니다.

또한 둘째가 집을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야만 했던 이유와,그로 인하여 후손들이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이 세상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근본 이유에 관해서도 말해 줍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비유가 모두 귀하고 보배롭습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가 그 중에서도 가장 보배롭고 소중하다고 하겠습니다. 평생을 찾아 헤매도 찾지 못할 경이로운 진리가 이 평범한 비유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첫째는 둘째가 집을 나가게 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 볼 것이며, 둘째는 둘째의 돌이킴을 통해서 참다운 회개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셋째는 집에 남아 있던 맏아들과 둘째의 비교를 통해서 이해하기 힘든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어떻게 명쾌하게 정리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이유
 
    우선 이 비유를 통해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둘째는 왜 집 나오기를 원했는가 ?
    이 비유의 등장인물은 아버지와 맏아들 그리고 둘째 아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현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집을 나가지 않은 맏아들에 속한 자들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집을 나갔다 돌아 온 둘째 아들에 속한 자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사는 집의 가장(家長)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집안의 모든 일에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다스립니다. 장롱을 어느 위치에 놓을 것인가?, 저녁 식사 시간은 몇 시로 할까? 등 가정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가장인 아버지가 결정하게 됩니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가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을 나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집을 나오기로 결정합니다. 아버지가 나가라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가기로 결정한 것은 둘째 자신이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사는 삶에 갈등을 느꼈고 싫었습니다. 물론 둘째가 장롱의 위치나 저녁 식사시간을 정하는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그런 문제라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성경에 기록될 만한 가치도 이유도 없습니다. 둘째를 집에서 나가게 했던 아버지와의 갈등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런 갈등의 한 예는 바로 비유 후반부에 나옵니다. 둘째가 결국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아버지는 큰 기쁨으로 맞으며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집에 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이런 행동에 몹시 분개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해 버린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것은 온당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 상황에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어도 아버지는 이런 점은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갈등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인 갈등은 어느 한 쪽이 참는다고 해소되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상존하게 됩니다. 둘째는 이런 본질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그것을 참고 살기보다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삶을 꾸려 가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물론 둘째가 이런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집을 떠난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고, 한번 떠나면 체면 때문에 쉽게 돌아 올 수 없다는 점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속박 아래에서 사는 삶에 비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둘째가 실질적으로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하면 아버지보다 더 잘 할 수 있고 또 더 좋은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지혜가 있었기에 집을 떠날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가 아버지의 것과 견줄 만하다는 자신감에 가장의 역할을 자신이 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둘째의 지혜는 타고 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둘째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아버지 것과 같은 질(質)입니다. 그래서 겨룰 만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주인의 다스림에 반기를 들고 보따리를 싸는 법은 없습니다. 강아지에게는 그런 지혜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둘째는 지혜롭기 때문에 집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 아담의 지혜로움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게 되는 과정은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 이 세상에 오게 되는 과정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가 집을 나가게 되는 과정과 아담이 에덴을 떠나는 과정은 본질상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와 아담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하니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하시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표면적인 의미만을 파악하는데 그친다면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 관계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면 탕자는 곧 아담입니다.
 
    둘째가 집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 지혜 때문이듯이 아담이 하나님 곁을 떠나게 되는 것도 지혜 때문입니다. 둘째의 지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으니 아담의 지혜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하셨고 아담은 하나님을 닮아 아주 지혜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겔28:12). 아담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은 결과 하나님 곁인 에덴을 떠나게 되는데, 그가 선악과를 먹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지혜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는 과정을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했고 여자는 아담에게 주어 먹게 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불순종의 길을 걷게 된 근본원인은 뱀의 유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뱀이 없었다면 아담과 여자는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런 나쁜 짓(?)을 한 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뱀은 지혜로움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3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서 뱀이 가장 간교 하더라는 말씀에서 간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룸' 입니다. '아룸' 은 '지혜로운', '슬기로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맥에 따라서 나쁜 의미로는 '궤휼한 자(욥5:12), 또는 '간사한 자(욥 15:5)'로 번역이 되었고, 좋은 의미로는 '슬기로운 자 (잠 12:16,23 등)'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인류 공통의 적(?)인 뱀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부정적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슬기롭다'라고 하지 않고 '간교하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원어 '아룸'은 좋은 의미로도 쓰이고 나쁜 의미로도 쓰입니다. 뱀에 관한 기존의 부정적인 시각을 버린다면 이 경우도 '슬기롭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황당한 생각일까요? 뱀은 절대적으로 나쁘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피조물도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상대적으로 나쁘게도 보이고 좋게도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뱀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말씀하십니다.

[마10:16]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성경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3장 1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지혜롭더라......" 하는 것이 성경의 맥락과 일치하는 번역입니다.
   
       뱀의 미혹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여자였지만 특별히 구분을 두지 않고 아담을 대표로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여자는 아담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지혜의 상징인 뱀에게 미혹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지혜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신 안에 뱀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외부의 뱀의 말에 동의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이 사람을 미혹했다고 뱀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통하기 때문에 마음을 여는 것이니 혹 탓할 대상이 있다면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혜롭게 창조하셨기에 결국 그 안에는 뱀의 요소가 있게 됩니다. 이것은 아담에게서 분리해 낼 수 없는 본질적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뱀을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에덴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설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뱀은 아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있는 그곳에는 뱀이 있습니다. 그곳이 하늘이던 땅이던 에덴이던 어디든 말입니다.
 
    아담에게 지혜가 있으니 하나님이 못 마땅하게 보일 때는 에덴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혜가 과연 문제는 문제입니다. 아담 자신도 하나님만큼 할 수 있고 오히려 더 나은 삶을 꾸려갈 수 있으리라는 은밀한 자신감도 있습니다. 마치 둘째가 아버지 집을 떠나기 전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담의 지혜는 아담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아느냐? 네가 그것을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 수 있을까 봐 너희를 경계하느라 먹지 말라고 한 것이야!"
    이 내용이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창 3:4-6]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만일 아담의 지혜가 절대 하나님께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아담은 뱀의 이런 미혹에 넘어 갈 수가 없습니다. 뱀이 유혹을 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내 주제에 무슨…? 나는 선악과보다 더 좋은 것을 먹어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가 없어."
    그러나 아담에게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겨루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장고(長考) 끝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창3:6). 그리고 결국 에덴을 떠납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에덴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에덴을 떠나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깊이 생각한 끝에 묵살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지혜롭다는 생각의 표출입니다.
 
    한 집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분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선악과 문제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갈등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근본적 갈등은 말씀 드린대로 아담이 지혜에 기인합니다.
    아무튼 아담은 에덴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 스스로만의 세상을 꾸려 나가게 됩니다. 아담이 에덴을 나오게 되는 과정은 탕자가 집을 나오게 되는 과정과 똑 같습니다.
 
  - 둘째 아들을 떠나도록 허락하신 아버지
 
    둘째가 떠나고자 하니 아버지는 그를 떠나게 합니다. 물론 그렇게 떠나겠다는 아들을 처음부터 순순히 떠나보낼 아버지는 없을 것입니다. 가면 죽을 고생할 것을 뻔히 아는 아버지로서는 온 정성과 힘을 다해서 아들이 떠나는 것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둘째가 독립하여 살기로 마음을 결정을 했다면 더 이상 그를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몸을 억지로 잡아 둔다 할지라고 그러나 마음은 잡아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지만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냅니다.
   
    그러나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한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아들이 먼 나라에 갔다가 그 나라의 참 모습을 체험하고 돌이켜 집에 다시 돌아 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소망을 간직한 채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합니다.

- 아담을 떠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

지금 같이 비교되고 있는 아담이 에덴을 떠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아담에 관한 창세기 3장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창3:17-19]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징계로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에덴에서 태어난 아담은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미지의 세상이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아담은 필연적으로 그 세상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만 있는 것이 일견 좋은 것 같으나 그것에는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아담은 에덴을 에덴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아담이 에덴을 에덴으로 인식할 수 있으려면 다른 세상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인데, 이 세상에 빛만 있으면 빛을 빛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빛 될 수 있으려면 어두움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처음 창조된 아담도 에덴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에덴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아담은 에덴을 나와 자기가 살아 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 봄으로써 에덴을 비로소 에덴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곁을 떠난 후에 온전해 질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을 떠나게 되는 과정에서 방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방관하고 계셨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아담이 에덴을 떠날 근본적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당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일이 다 끝난 후에야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할 마음이었다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지 않거나, 아니면 두루 도는 화염검을 선악과 주변에 두어 아담이 얼씬도 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먹는 길을 열어 놓고 방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아담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는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자유의지란 결국 선악과를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은 자유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자유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고 처벌하고 에덴에서 내어 쫓는다면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을 반쪽 의지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은 자체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험하여 온 인류를 고난에 처하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할 목적으로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힘으로 키우실 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창조의 한 과정입니다. 한 순간 불순종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은 무의미한 각오도 다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아담과 달리 절대 선악과를 먹지 않겠다."
    말씀드린대로 우리 모두는 이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지 않겠다는 다짐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먹지 않겠다는 선악과 이미 먹었습니다.

- 우리의 의문 - "나는 내 의지로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는데......."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듭니다. 자신은 선악과를 보지도 못했으며 먹은 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입니다. 단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살펴 본 대로 성경이 아담을 통해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시점에서 그 존재가 처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원래 하나의 아담으로서 에덴이라 칭하는 하나님 곁에 있던 영적 존재들입니다. 에덴에 있다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은 육신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향(本鄕)도 이 물질세계가 아닙니다. 저 하늘나라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먹은 사실이 없다'는 진술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면 필연적으로 먹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부인한다면 결국 '나는 인간 종(種)이 아니다'는 말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먼 나라
 
    탕자의 비유로 돌아옵니다.
    둘째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갑니다. 둘째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가장인 아버지와 아들은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에서는 통치자와 둘째는 법에 의해서 연결된 관계입니다.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와 법으로 연결된 관계의 차이를 아실 것입니다. 전자는 사랑으로 연결되었고 후자는 법의 다른 면인 거래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비유에서 아버지 집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에 반하여 먼 나라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온 많은 둘째 아들들이, 자신들이 만든 법에 의해서 체제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통치자를 마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눅 4:5-6]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와 같이 마귀는 이 세상이 자기에게 속했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내용도 같은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악한 자의 손에 처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세상이란 우리가 보는 물질적인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상과 지혜와 노력으로 창조한 세상체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할 목적으로 법과 규칙을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실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세상 체제를 운영하는 인간들을 악한 자라고 밝힙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속성상 법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제한되며, 압제 당하고, 빼앗기고 또 멸망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하나님 나라에서와 같이 서로 생명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법으로 연결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우리를 죽입니다. 요한복음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결국 법의 세상에서 살다가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멋도 모르고 이런 세상을 동경하여 왔습니다. 우리도 둘째와 같은 생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에 온 둘째 아들들입니다.

* 무릎치며 읽는 성경(저자:정덕영)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http://www.jay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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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반 세겔 정덕영 2011-01-11 5662
15 새벽기도 댓글(1) 정덕영 2010-10-09 8245
14 어떤 사모 정덕영 2010-10-08 5010
13 무당의 병고침 정덕영 2010-10-08 5091
12 적그리스도 정덕영 2010-05-09 4835
11 바로의 꿈 - 일곱 살찐 암소와 일곱 파리한 암소 정덕영 2009-08-31 6228
10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비밀 정덕영 2009-08-21 10307
9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 정덕영 2009-08-14 7406
8 지붕 위에 있는 자와 밭에 있는 자 정덕영 2009-07-31 5924
7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정덕영 2009-07-28 10287
6 나아만 장군의 "내 생각에는..." 정덕영 2009-07-24 8211
5 삼손의 재조명 정덕영 2009-07-04 7775
4 탕자의 비유 (3/3) - 율법과 복음의 차이 정덕영 2008-05-25 6863
3 탕자의 비유 (2/3) - 참다운 회개의 본 정덕영 2008-05-25 5771
열람중 탕자의 비유 (1/3) -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이유 정덕영 2008-05-25 5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