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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탕자의 비유 (2/3) - 참다운 회개의 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5-25 15:27 조회 |5,744회

본문

참다운 회개의 본


- 둘째 아들의 허랑방탕한 삶 (눅15:13)

  둘째는 먼 나라에 온 이후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기쁨을 얻고자 집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지만, 이제 먼 나라에서는 인생에 관한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해야 했습니다.

  둘째는 이런 것을 이미 예상했습니다. 모르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성공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 달리 성경은 그가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고 합니다. 악착같이 잘 살려고 했어야 할 그가 어찌 된 이유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야만 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한 삶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둘째 아들을 비난합니다. 그 근거는 그가 아버지의 집을 나갔고 그리고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탕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해 버림으로써 그를 그렇지 않은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참 의미를 잃고 맙니다. 비유의 참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존 인식과는 달리 둘째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려 하지 않고 잘 살아 보려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 갈 수 없는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먼 나라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먼 나라의 삶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원치 않게 망했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비참한 상황에서도 쥐엄 열매라도 먹고 악착같이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탕진하고 죽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쥐엄 열매를 구걸하고 뭐고 간에 그 상황에서 그냥 자살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살고자 했습니다. 끝까지 살아서 성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허랑방탕한 삶은 그가 선택한 삶이 아닙니다. 살다 보니 그런 결과가 되었을 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 죄인, 창녀, 간음하다 잡힌 자들의 경우도,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이 세상에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 보니 원치 않게 그런 삶의 결과를 얻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골라서 선택한 삶이라면 책망도 하고 비난도 하겠지만, 원치 않게 그런 삶을 맞은 사람들을 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뿐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습니다. 그를 탓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불쌍히 여길 대상일 뿐입니다.
 
- 만일 둘째가 허랑방탕하지 않았으면.......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허랑방탕이란 물질적 재산을 허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탕자라고 명명하여 낙인 찍는 근거도 그의 허랑방탕한 삶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만일 둘째가 먼 나라에서 성공하여 기근이 들어도 꿈쩍하지 않을 부를 축적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허랑방탕하게 살지 않았고 재산을 축적했으니 아버지의 훌륭한 아들일까요? 아닙니다. 성공을 했더라면 오히려 아버지께 돌아 올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 돌아 갈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먼 나라에서 망한 후, 죽음까지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 집으로 돌아 올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만일 돈을 많이 모아 성공했다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충분히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들이 허비한 재산입니까? 당연히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과연 아버지는 아들이 허랑방탕한 삶으로 허비한 재산을 전혀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묻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들이 집에 돌아 올 수 있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둘째의 허랑방탕한 삶을 비판하는 사람은 아들의 귀향보다 재산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비유에서 둘째가 축 낸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집에 남아 있던 맏아들입니다.

[눅15: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동생이 살아 돌아오든 말든 상관치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탕진한 재산이 아까웠고 그런 동생이 얄미울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맏아들이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가치 기준은 오직 재산이었습니다. 그 기준으로 동생을 판단하고 그 기준으로 아버지를 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가치 척도도 자신과 같이 재산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명령대로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늘리는 일꾼(?)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기뻐할 것이고 그러면 아버지가 자신에게 염소새끼라도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우리도 대부분 하나님을 이런 맏아들의 시각으로 보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많이 열심히 지키는가?가 믿음의 척도입니다. 금식, 기도, 주일성수, 구제, 헌금 등 이런 것들을 많이 그리고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간주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재물'입니다. 이런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성경은 부자라고 합니다(마19:22). 이런 재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대가로 천국에 입장하려는 것이 우리의 허술한 믿음 논리입니다. 맏아들이 염소새끼를 기대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변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즉, 맏아들과 같이 명령에 순종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맏아들이 둘째로 변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지금까지는 허랑방탕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통해서 둘째 아들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이제 이 단어의 영적인 의미를 통해서 먼 나라에서 둘째 아들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 허랑방탕의 원어

  사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허랑방탕(虛浪放蕩)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허랑방탕한 삶'은 NIV성경에서는 'Wild Living'으로, NASB성경에서는 'Loose Living'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는 '존 아스토스'입니다. 여기서 '존'은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스토스'는 '허랑방탕'이라는 의미로서, 부정(否定)을 뜻하는 '아' 라는 접두사와 '구원하다' 또는 '안전케 하다' 는 뜻인 '소조'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원어 분석적 의미는 '구원 없는 삶'입니다. 결국 둘째 아들의 허랑방탕한 삶은 구원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럼 둘째 아들의 구원 없는 삶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비유에서 먼 나라는 구원이 없고 안전치 못한 곳입니다. 그런 곳이니 둘째는 그곳에서 죽을 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런 반면 아버지 집은 구원이 있고 안전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집은 구원과 안전함을 상징합니다. 둘째가 구원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를 떠나 혼자 살았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여 그의 삶이 허랑방탕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의 허랑방탕함은 먼 나라에서의 삶에서 낭비벽이 심하고 방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그런 삶은 아버지 집을 떠남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삶을 원치 않으면 애초에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 먼 나라에 있는 둘째는 바로 우리의 모습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는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온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먼 나라인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해서라도 성공을 하고자 합니다. 재산을 모으고, 권력을 쟁취하고, 또 사회적인 명성을 얻으려고 모두들 열심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좌절을 겪고 망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의도적으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서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 결과에 의해서 그런 삶을 산 것으로 딱지가 붙여지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또한 이 세상은 본질상 모든 사람들에게 허랑방탕한 삶을 가져 다 줍니다. 우리가 열심히 모았던 모든 것을 세상을 떠날 때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전력투구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온 우리 인생들이 삶을 꾸려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온 삶 자체가 구원 없는 삶으로서 허랑방탕한 삶입니다. 먼 나라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미 허랑방탕한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탕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 참다운 회개의 본 / 돌이키는 둘째 (눅15:17-20전)

  둘째는 열심히 살아 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진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흉년까지 들어 돼지 치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해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둘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이 있지만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맞아 달라고 하리라."

  여기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는 고백은 당시 어떤 한두 가지 잘못한 행동을 회개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자기 식으로 살았던 삶 전체에 대한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죄인 된 삶은 아버지를 떠나 온 것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맞으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는 말은 죽음을 앞두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 고백입니다. 이것이 한 인간의 참다운 회개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려면 이 둘째 아들과 같은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 없이 그냥 입으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참다운 고백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왜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 믿고 복 받고 싶은 마음에 그냥 자신이 죄인이라고 동의해 줍니다. 이렇게 죄인 된 삶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죄인이기는 하되 실상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사이비(似而非) 죄인'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도 둘째 아들과 같이 인생길에서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 때가옵니다. 그때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면 그것이 자신의 참다운 회개입니다.
 
  - 한없이 기뻐하는 아버지

  자기식 삶의 한계인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는 먼데서 오는 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매일 같이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둘째 아들들입니다. 하나님 집을 떠나와 이 세상에서 혼자 살다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야 비로소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 중에서 참다운 회개를 하는 아들이 있는지를 살피고 계십니다.

[시 14:1-3]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사람을 보내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가서 아들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만일 이래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아버지는 애초에 이 아들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잡아 놓았을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억지로 둘째를 데려 온다 해도 집을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여전히 남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냥 그대로 모든 문제의 본질을 조명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풉니다.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에게 집 나갈 때 가져간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무슨 사업을 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아들을 먼 나라로 보낸 목적이 재산을 불리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가 깨닫고 스스로 돌아 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바람이 없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로서는 처음 아들을 내 보낼 때 마음에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돌아 오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니 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 자체로 그를 떠나보냈던 아버지의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이 재회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 하나가 회개한 모습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는 크게 기뻐합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기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 성공한 의사인지, 아니면 창기를 멀리한 경건한 사람이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회개하고 돌아 온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 먼 나라

  먼 나라는 둘째 아들에게 힘든 삶을 안겨 주고 착취하고 망하게 하는 역할을 했지만 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참다운 아들로 만들어 돌려보내 준 것입니다.
    먼 나라는 항시 그렇게 힘이 들고 어려워야 그 나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어려움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옴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먼 나라에서의 힘든 삶은 이래저래 하나님의 섭리에 딱 들어 맞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나면 고생이라는 측면을 알려 주어서 그렇고, 둘째는 그 고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된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천국 건설을 기치로 내세우고 사람들을 미혹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런 어떤 시도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 건설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천국인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꾸민 세상은 무슨 짓을 해도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각자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곳이 천국입니다.
   
  - 회개한 둘째에게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 (눅15:22-23)

  아버지는 돌아 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에게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를 주고 신을 신깁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제일 좋은'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토스’ 입니다. 이 단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3)"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음이라는 말에 쓰인 원어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옷이라 함은 의(義)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 준다는 의미에서 옷은 곧 의를 상징합니다. 아담이 여자와 함께 선악과를 먹고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무화과 나무 잎으로 스스로 치마를 해 입었으나 하나님은 가죽 옷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지어 만든 옷은 인간들이 스스로 이룬 자기 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행하고 그 행한 바에 근거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한 사람은 속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행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으니 하나님이 자신을 홀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심판 때 이렇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나는 수 많은 선행을 했습니다. 천국 갈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끄러움을 당치 말아야 합니다.'

- 무화과 나무 옷을 벗기는 의미

  성경은 이러한 자기 의를 무화과 나무로 엮은 옷(치마)으로 비유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옷을 벗기십니다. 이 의미는 인간의 의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은 왜 인간의 의를 인정하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문은 인간의 의나 하나님의 의나 그게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제, 십일조, 봉사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구제, 십일조 봉사와 외형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야 합니다.

  이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표현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의 비유에 나옵니다. 장터는 세상의 거래 법칙이 적용되는 인간 사회이고, 포도원은 생명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포도원의 원리를 비판하자 포도원 주인이 하는 말이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마20:15)" 고 합니다. 포도원은 그 주인의 뜻대로, 생명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포도원에서도 장터의 의(義)가 통용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포도원에 있으려면 그에 합당한 포도원의 의(義)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인간의 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죄인의 모습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에덴을 떠나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의 의는 의가 아닙니다 (사64:4). 가짜입니다. 하나님께 인간의 의를 인정해 달라고 한다는 것은 곧 가짜를 진짜로 인정해 달라는 말과 같이 억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만이 의입니다 (마19:17).

  사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표현하지만, 모든 성경말씀이 그러하듯 이 말씀에도 그래야 할 당연한 이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의를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은 인정하여 상급으로 쳐주고 어떤 것은 싫어해서 징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모두 다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인정해 준다고 해서 모두가 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자기 의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휘발유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휘발유를 소지한 채 불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이 소지한 이 휘발유로 인하여 자신이 불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사람은 누가 그렇게 하려는 것을 알면 휘발유를 내려 놓으라고 강권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기 의도 이런 휘발유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의로 자신을 무장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쌓은 자기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의 경우를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의를 쌓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이 아담과 여자가 무화과 나무로 엮은 만든 옷을 벗기는 의미입니다.


- 가죽 옷의 의미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화과 나무 잎으로 만든 옷 대신 가죽 옷을 주시는데, 이 가죽 옷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제일 좋은 옷입니다. 둘째 아들은 제일 좋은 옷을 스스로 엮어서 입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준비해 준 것을 거저 받은 것입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즉, 예수로 말미암아 온전히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의인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자기 의는 무화과 나뭇잎과 같이 죄를 가리는 임시방편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죽 옷은 사람을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제일 좋은 옷 이외에도 둘째 아들에게는 가락지가 주어 집니다. 가락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위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전권을 위임 받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전권위임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또한 전권위임의 상징물이 가락지입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요셉이 바로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전권을 위임 받습니다. 그때 요셉이 바로 왕에게 받은 것 중에는 둘째 아들이 받은 것과 같은 품목이 두 가지 있습니다. 즉, 세마포 옷과 반지입니다.

[창41:40-43] 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이와 같이 가락지는 전권위임을, 전권위임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가락지를 받은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은 신발도 받고 살찐 송아지 고기를 먹었는데,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삶을 묘사합니다. 신발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 (엡6:15)을 상징하고 살찐 송아지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와서 힘든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지쳐 쓰러지게 되었을 때 아버지 집이 천국이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니,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좋은 옷, 가락지, 신발, 살찐 송아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회개를 하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 왔을 때 그의 믿음의 구약시대는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 무릎치며 읽는 성경(저자: 정덕영)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정 덕 영
목 사
자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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