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탕자의 비유 (3/3) - 율법과 복음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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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08-05-25 15:34 조회 |7,181회본문
율법과 복음의 차이
- 맏아들
누가복음 15장에서 맏아들에 해당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눅15:25-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언뜻 맏아들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아버지 명을 잘 따랐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아들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경우도 맏아들이 아버지가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벌리는 것을 보고 흔한 심통을 부린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의 행동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동생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그렇게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에서 맏아들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계보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준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비유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맏아들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믿음이 맏아들과 같은 패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둘째 아들과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함을 받으려는 맏아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대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무엇인지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맏아들과 같이 자기 의를 세우기에 열심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롬 10:2-3]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맏아들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아버지 명을 어김없이 지켰습니다. 이것이 곧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라는 로마서의 말입니다.
결국 맏아들은 자기식 의에 집착한 나머지 불행한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결과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 화가 난 맏아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 온 맏아들은 둘째를 위해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는 몹시 성질이 났습니다. 자기는 집에 남아서 착실하게 일만했는데도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주지 않더니,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동생을 위해서는 큰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철저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그래서 몹시 화가 났습니다. 누구라도 맏아들과 같은 입장에 처한다면 화를 낼 것입니다. 맏아들의 화는 당연합니다.
우리는 화 내는 것 자체를 악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스러운 감정 중에는 화를 내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로 악할 수는 없습니다. 실상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 아비 마귀에서 난 자, 평토장한 무덤'이라는 격한 표현을 썼고, 또한 사도 바울도 시편을 인용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라는 표현을 했던 것을 봅니다. 이런 말들은 화가 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해서 그들을 나쁘다 또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의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화는 어떤 사람이 내느냐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또한 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맏아들이 화를 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문제는 가장인 아버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에 화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결정에 화가 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집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맏아들이 아버지의 결정에 화를 내게 되니까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집 밖에서 서성거려야 했습니다. 그가 동생을 대하는 마음과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마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만일 그가 동생을 대하는 마음이 아버지의 것과 같았다면 그렇게 화를 내고 집 밖에 서성거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함께 잔치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집에 함께 거할 수 있으려면 아버지와 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 맏아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우리
우리는 이런 맏아들에 관한 깊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화나는 감정을 억제하고 사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맏아들로서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이해하자, 암, 당연히 그래야지…." 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삭이는 행동이 곧 믿음이요 순종이라고 이해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참고 억제한 것에 대한 보상을 나중에 천국에서 받는다던가 아니면 언젠가는 복으로 되돌려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 그렇게 경계하는 자기 의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무모한 시도인 것입니다.
왜 이런 시도가 계속되는가 하면, '탕자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예수께 달려 와서 충성을 맹세하는 식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되면, 결국 하나님 앞에 내 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계명에 따라 주일마다 교회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드렸고, 봉사했고, 금식했고, 구제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말들은 곧 지금 맏아들이 하고 있는 말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또한 맏아들과 같은 본질의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눅18:11-12]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종합하면, 맏아들과 바리새인들은 한결같이 ‘나는 무언가 했다!’는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적 믿음의 표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그럼 십일조, 헌금, 구제, 봉사, 금식할 필요 없고, 토색, 불의, 간음해도 괜찮다는 말이냐?"
이런 반문은 자신이 맏아들 또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맏아들과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문제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하면 자기 의로 남게 되고, 안하면 교회 나오지 않는 불신자와 똑같아져 신자라는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십일조를 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입니다. 자신의 믿음도 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오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의 자리에서 나와 둘째 아들의 자리에 서게 되면 십일조, 구제, 헌금, 봉사 등에 관해서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면 하고 안하면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맏아들이 둘째 아들의 행동을 해서 둘째 아들의 자리에 있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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