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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의 생명, 예수의 생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덕영 작성일 |10-02-20 21:24 조회 |3,250회

본문

잘 오셨습니다.

 

1. 육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우리는 모태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 오게 됩니다.
한 생명을 받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받은 생명은 
인생을 살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리 좋은 가치를 내건다 하더라도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위선적이고,
거짓투성이인 삶으로 종결 짓게 됩니다.
교육 받아도 안되고, 금식하고 마음을 굳게 먹어도 안됩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그 방식대로 허술하게 예수 믿어도 안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우리가 가진 생명으로
우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렘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흑인이 그 피부 색을 바꿀 수 없고, 표범이 그 반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명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거짓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생명의 표출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을 원천적으로 치유하려면
모태에서 받은 이 생명과는 다른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생명을
"육"이라고 하고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도 "육" 이라고 합니다..
또 이런 생명을 가지고 사는 자를 "죽은 자"라고 합니다.

 

2. 영

 

이렇게 "육"의 생명으로 살던 자가 그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십니다.
이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를 이끌고 
십자가에서, 제자의 옛사람과 함께 못박히시고,
제자들의 마음 안에 부활하십니다.

이 과정이 육의 생명을 가졌던 제자가, 십자가에서 그 "육"의 생명이
죽고, 예수가 자신 안에 부활함으로 새로 받게 되는 "영"의 생명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새롭게 받게 되는 "영"의 생명을 이름하여
"영생"이라고 합니다. 또는 "(아가페)사랑",  "예수의 생명",
"예수의 믿음" 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임하면
이전에 자기 욕심에 따라서 살던 육의 삶, 죄의 삶을 정리하고,
이웃에게도 예수의 생명을 주는 사랑의 삶을 자연스럽게 살게 됩니다.  

 

이것은 노력이 아니라, 생명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본질의 생명을 가졌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영"으로 거듭난 자이고, 자신 안에서 예수가 부활한 자이고
예수가 자신 안에 재림해서,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하나님을 찾을 기회를
가지라고 한시적으로 허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3.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고 그리고 '생명'이라고 두 부분으로 말씀하십니다.
'부활'에 해당되는 부분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100% 순종하여 예수를 따라 나서면,
십자가에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을 것이고,
그러면 영원한 예수의 생명이 네 안에 임해서 영생을 얻은 자가 된다."
이 뜻이겠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에 예수와 함게 죽는 자의 부활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자신을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살았으니 부활입니다. 예수는 물론이고 예수와 연합한
우리 자신도 그러합니다.

 

다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되는 점을 말씀하십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는 살았고 (예수의 생명을 받았고),
그가 곧 예수 믿는 자이며,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다."
즉, 자신이 곧 영원한 '생명' 되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영원이란 시간의 계속됨의 영원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의 속성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4.  지금 여기 있는 예수

 

예수께서 거듭난 제자들의 마음 속에 왕권을 가지고 성령으로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모든 성구, 함께 왕노릇 하신다는 말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물론 동시적 재림으로 보는 사람들은 똑 같은 성경 말씀을
저 높은 천국에서의 일로 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읽기를 원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저에게
예수의 물리적, 우주적, 가시적 재림으로 보이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보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 옳다하는 바 대로
믿으면 될 것입니다.

 

님은 어떤 생각을 가진지 모르겠지만,
가시적 우주적, 동시적 재림을 기다린다는 분들에게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예수를 "내일 온다," "모레 온다", "즉시 온다," "곧 온다, 금방 온다"
(물론 날자를 지정하지 않겠지요) 하면서 지금 여기서 예수 만나는 것을
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좋고 그래서 '오늘 올까' '내일 올까' 기다린다면,
'지금 여기'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진정 예수를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일은 항상 내일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예수는 '관념 속의 예수'이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신기루입니다.
그런 예수는 지금 여기의 우리를 고쳐서 "영"으로 거듭나게 하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말로는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 없이 못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 예수의 재림을 미래로 미래로만 생각하려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예수 없이 즐기려는 의도입니다.
예수와 마음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예수를 죽어서 만나면, 그 예수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착각입니다.

자신이 지금 예수가 싫어서 미래로 밀어 놓고 있는 판에
죽어서 예수를 만나면 예수가 자신을 환영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싫어하는 자신이 예수를 환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래 저래 예수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지금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니까,
그 결과로 예수님도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앙심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사람이 자기 옳다함으로 예수를 거절하고 배척하니까,
예수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생명의 원천인 예수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무슨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육"의 생명의 몸짓에 불과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선의 실체이신 예수가
자신 안에 임한 후에 그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구름타고 예수가 재림하는 일이 있건 없건
예수가 이미 내 안에 임해 있다면 그것이 참된 복입니다.
진정 예수께 인정 받고자 한다면 
하늘 구름타고 올 그때를 기다린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인정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댓글목록

성터지기님의 댓글

성터지기 작성일

목사님의 말씀,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인간적인 차원의 감사에 흡족해하시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육적인 차원에서도 저의 마음은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군요.
요즘 마태복음서를 다시 읽고 있는 중입니다. 하여 궁금해 하던 것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4절
제자들의 세상 끝날 때의 징조에 관한 물음에 비유로 말씀하시는 장면인데요,

3절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중략

3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여기서 이 세대란 우리 각자의 육이 살아 있는 동안의 한 세대(살아 있는 육의 시간적 생명)를 일컬음인지요?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나옵니다만, 현재 지금 성경말씀 본문을 읽는 우리(나)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분명 저에겐 예수님의 영(성령)께서 임재하심을 압니다.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의 평안을 누리고 있거든요. 말씀으로 충만할 것 외에는 더 이상 바랄 복이 제겐 없습니다.
다만 여느 사람들처럼 내가 그리스도(말씀)의 영, 성령을 가졌으니 내가 그리스도라 하는 선언은 하지 않고 있지요.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몫이기에 제 입으로 논할 문제는 아니구요. 비록 깨달음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하여 늘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고 있지만요. 말씀을 전하고픈 마음으로만 가득해서 늘 그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이 땅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귀한 것이 없으니 말이지요. 성령을 받고 난 후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시니 사람에게 구할 것은 없으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러했듯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믿음을 굳게 한 일을 교훈 삼아 이 곳 사이트에 올려진 말씀처럼 믿음에 기초한 글을 찾아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자나 깨나 하늘의 일(생명을 살리는 일)만을 생각하고 있지요. 물론 이 땅에서의 생활도 청지기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엄청 부족하겠지만...

주로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옳다하는 그 의로 인하여 옛 자아에서 벗어나기 힘들기에 고침을 받으라 하시는 것 같은데요. 목사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옳다함의 의를 고침 받은 기준을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그냥 개인 스스로가 알 것인 문제인지요?
믿는 자들의 마음이 늘 그렇지 않은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늘 죄인으로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인식... 일면 그리스도와도 같아 보이는 사도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고 고백한 일에서도 보듯이 말이지요.
그러한 인식을 목사님께서는 고침을 아직 받지 못했다고 보시는 건지요?
목사님의 말씀과 설교를 읽고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저를 돌아보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에 대하여 일부러 공부하거나 익힌 적은 없지만 그간 알게 모르게 익혀진 교리가 많은 부분 저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특정의 많은 사람들의 잠자는 영을 깨우느라 열정을 가지고 사역 중이신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축복합니다.

샬롬!

정덕영님의 댓글

정덕영 작성일

성터지기님,

1. 마 24:34절의 "이 세대"

이 세대라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율법의 시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 말씀드린 "육"의 생명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고침을 받기 이전의 자신이 이 세대에 속합니다. 
그 '이 세대'는 예수에 의해서 자신이 고침을 다 받아야만 지나가고,
그때 "새 세대"가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가 지나가지 전에, 이 모든 종말의  일이 다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나는 매일 죽노라"

이 바울의 말은 자신의 옳다함을
매일 죽는 마음으로 내려 놓고 고침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으로서,
다른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죽는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예수에 의해서 온전히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죄와 상관이 없게 된 의인입니다.

3. 자기 옳다함

자기 옳다함의 의를 고침 받은 기준을 질문하셨습니다.
사실 자신이 늘 죄인이라는 인식, 매일 겸손하게 자신을 죽인다는 생각을
스스로 가진다고 그것이 기준일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는가
보면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을 뼈져리게 느꼈다면,
그 분은 예수에 의해서 자기 십자가로 인도되어 "영"의 새생명을
얻을 길로 접어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진정한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옳다함을 예수 앞에 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된 인생을 살게한 장본인이
자기 옳다함의 옛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옛사람을 버리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긴 바탕에서
비로소  예수가 와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전의 오는 예수는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낸 자신의 구미에 맞는
예수입니다.

이것은 조금 더 깊이 샏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성터지기님의 댓글

성터지기 작성일

“이 세대”와 “자기 옳다함” 에 대하여 친절하게 풀어서 말씀주심에 그대로 받으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바울의 “나는 매일 죽노라”에 대한 풀이를 주심에 대하여 제가 조금 더 이해를 해야 할 부분이 생기는군요.

로마서 7장 1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 자기 지체 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자기를 곤고한 자라고 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까지 표현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라비아까지 건너갔다 온 이후 여러 사역과 선포하는 말씀등을 통하여 거듭난 분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여전히 죄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아닌지요? 

이제껏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거든요. 다른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사역은 사역인 것이고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서 싸우고 있는 생명의 법(복음)과 사망의 법(옛 속사람)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바울이 그렇게 번민하며 괴로워했던 것이 아니겠는지요. 하여서 자기의 옛 속사람을 매일 죽이느라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고백한 것이 아닐까요? 목사님께서는 “다른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죽는 것”을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씀을 주셨는데요.
남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 없는 것이 복음에서의 구원이 아닌지요? 구원은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과 각 개인의 일대 일의 문제일 것인데 말이지요.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마음과 육신의 법이 한 지체 내에 있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고 읽고 있거든요. 한 지체에 두 법이 있으나 생명의 법(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육신의 법)을 이기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대목 아닐까요? 참된 십일조에 대하여 목사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셨듯이 율법이 있지만 폐한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인하여 믿음이 완성됨으로 완성된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드렸던 의, 인, 신의 십일조를 드리게 된 것 처럼 그 율법이었던 십일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드리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로요.

목사님을 번거롭게 해드리는 점은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대하여,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뜻에 맞는 해석이 간절하기에(한 생명이 걸린 일에 잘못된 풀이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는 없겠기에) 이렇듯 실례를 무릅쓰고 목사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귀찮게 여기신다기보다 앞서 목사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니신 분으로서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세요.
샬롬!

정덕영님의 댓글

정덕영 작성일

1. 점진적 기록

로마서는 생명이 자라는 점진적인 과정에
입각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이라는 말은 그런 사망의 자신을 
예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 다음 8장 1,2절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7장의 사도 바울의 말을 분리해서 그는
죽을 때까지 죄 문제로 고민했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도 죄문제로  이렇게 고민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거듭나도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그런 죄문제로 곤고한 인생을 평생 보냈다면
예수의 영 단번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죄악 세상을 떠난 자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죄 문제로 매일 죽도록 고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죽은 자를 위해 받는 세례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한 것은 그 이전절의 맥락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으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은 자는 누구이고,
죽은 자를 위한 세례가 무엇인지를 우선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후,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전 15:29-31]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 성터지기님,

제가 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릎치며 읽는 성경 1,2,3" 및
"영혼의 닻"을 읽으시고, 이곳에서 전하고자하는 복음의 개요을
우선 파악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이런 방식으로 긴 시간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님의 말씀을 향한 열심과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하심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계속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샬롬....

성터지기님의 댓글

성터지기 작성일

귀한 시간을 저를 위해 할애해주심에 고밉습니다.
풀어 주신 말씀 깊이 묵상하겠씁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많은 교훈을 얻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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